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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 도살장>의 이야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어느날 외계인에 의해 납치되어 외계행성 트라팔마도어로 납치된 바 있던 빌리 필그림은 그들로 인해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이동을 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일직선처럼 달려가는 시간 대신 그 시간 전체를 바라보거나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테드 창의 소설 <컨택트>에서 역시 미래는 과거를 딛고 만들어지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끌어안은 시간이다. <컨택트>에서는 그 시간의 흐름을 언어의 문제로 변환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순차적으로 발생하거나 원인과 결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이 과거를 아는 동시에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당신의 현재를 뜻하는 것이라면, 당신의 언어는 어떤 방식으로 시간과 소통하게 될 것인가. 부분적으로나마 우주를 다루는 소설이라면, 그 우주의 공간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 홀드먼의 소설 <영원한 전쟁>에서는 콜랩서 점프라는 장치가 등장하는데, 이것을 통과해 다른 행성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공간을 이동하는 것은 동시에 시간을 건너가는 일이기도 하다. 떠났던 공간으로는 다시 되돌아올 수 있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으로는 되돌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영원히 전쟁 중’이고, 그것이 유일하게 그가 존재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영화 <컨택트>에서 언어학자 루이스는 외계인 헵타포드에게 제일 먼저 인간(Human)이라는 단어를 직접 써서 보여주며 소통을 시도한다. 이후 루이스는 헵타포드와 서로의 언어를 배워가며 소통하게 된다.

문학에서 보여주는, 혹은 이야기해주는 우주보다도 과학에서 보여주는 우주는 훨씬 냉정하게 보인다. 영원한 전쟁을 하거나, 시간을 뛰어넘어 그 시간의 허무를 바라보는 주인공들보다 어떤 의미에서 과학 속의 우주는 더 허무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우주에 대해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실은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 실은 96%쯤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우리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는 4%를 제외한 우주의 96%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암흑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그것이 검거나 불길해 보여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이다.

맥락 없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 이 암흑물질, 암흑에너지를 발견하게 된 과정에는 미국의 여성 천문학자 베라 루빈이 있다. 이 위대한 학자를 설명하기에 앞서 굳이 ‘여성’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마땅치는 않으나,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충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이분에게 워낙 많아서이다. 대학의 입학사정관이 그녀의 취미가 그림 그리는 것이라는 걸 알고는 그렇다면 천문학자보다는 별들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는 에피소드부터 시작하여 오직 여성화장실이 없다는 핑계로 여성의 방문을 거절했던 천문대들의 관례를 깨고 최초로 팔로마산의 천문대에서 관측을 한 여성 천문학자가 된 사실 등은 유명한 이야기들이다. 그녀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이유 역시 여성이라는 ‘장애’ 때문이 아니었느냐는 의혹도 있다. 실제로 이제까지 물리학 분야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는 두 명에 불과하니, 기막힌 일이기는 하다. 베라 루빈은 세계 절반의 두뇌는 여성들의 것이라는 말도 했다.

베라 루빈은 여성으로서 성공한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엄마로서 성공한 과학자로도 유명하다. 과학자로서 처음 명성을 얻기 시작할 때 이미 한 아이의 엄마였고, 그 후 차근차근 연구실적을 쌓아가는 동안, 역시 차근차근 아이를 낳아 마침내 암흑물질의 존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할 때는 자그마치 네 아이의 엄마였다. 이분, 혹시 초인이었던 게 아닐까.

그녀가 최초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때,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젊은 엄마가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다. 그녀에 대한 관심이 여성이라는 것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에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이 먼저 박사과정을 시작한 후 아이 양육을 위해 자신은 학위 과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매우 ‘전형적인’ 이야기, 한 손에는 논문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끌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갓난아이를 안고 학회에 참석했다는 이야기, 그러는 동안 그녀가 어쩌면 홀로 흘렸을지도 모를 한숨과 눈물에 대한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도 보인다. 네 아이의 엄마이면서 조지타운 대학교의 조교수가 된 루빈이 한 말. “은하가 상당히 놀랍기는 하지만, 태어나고 두 살이 될 때까지 아이를 돌본다는 것도 그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다르게 들린다. 그만큼 놀라운 일입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로 읽힌다. 물론 놀랍고, 물론 아름답고, 물론 고귀하지만,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알다시피, 그건 정말로 힘든 일이다. 천재이거나 아니거나, 위대하거나 아니거나, 그건 도움이 필요한 일이고, 매우 총체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며, 도움이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게 당연한 것이어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출산 문제 역시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런데 그걸 돈으로 풀려고 하는, 더 기막히게는 정신적인 문제로 보려고 하는 정치인들의 화법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값은 대체 얼마면 되는 걸까. 미래의 가격, 존재의 가격, 존엄의 가격은. 나와 내 아이와 내 아이의 아이들의 존엄의 가격은 말이다. 이 나라에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정말이지, 우주를 발견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인데. 또한 그토록 소중하고 고귀한 일인데.

소설을 읽다가 과학책을 읽다가 맥락도 없이 ‘그녀는 네 아이의 엄마였다’라는 문장에서 멈춰, 온갖 생각을 다 하게 되는 하루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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