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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추억이다.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 정권이던 시절.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지만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시위를 하기 위해 강의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시위는 강제진압에 의해 오래 지속될 수 없었지만 울분은 오래 남아 해 저무는 시간부터 해 뜨는 시간까지, 어쩌면 잠들어 있던 시간까지도 그 울분과 슬픔이 몸속에 있었다. 내 친구와 선후배들 중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갔고, 많이 다쳤고,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감옥에 가는 것이 두렵고, 목숨 거는 것은 더욱 두려운 나는 간신히 시위대열의 후미에 섰을 뿐이다. 그랬음에도 간혹 나는 운동권 작가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선후배들에게 송구해 그걸 감당할 수 없었고,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고 부인하면 마치 그 시절 선후배들의 희생을 부인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차마 아니라고도 못했다. 그 시절의 많은 사람들, 말하자면 30년 전 시청 앞으로 쏟아져나왔던 수십만, 그들을 격려하던 수백만의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이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절을 거쳐온 우리 모두는 운동권, 운동권의 부모, 운동권의 자식들이다. 여전히 송구스럽지만, 이제는 더는 민망해하지 않으며 말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왜일까, 세상이 바뀌었나? 대통령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 시절, 거리 시위를 하던 어느 하루가 떠오른다. 강제진압을 하는 경찰들, 혹은 폭력배를 피해 골목으로 뛰어들었다가 마침 문이 열려 있던 어느 집으로 달려들어가게 되었다. 안방이고 다락방이고 시위하다 피해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서로는 서로를 몰랐고, 물론 주인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눈 깜빡할 사이에 안방을 내주고 다락방을 내주게 된 주인은 마루에 서서 집 안과 집 밖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은 전통시장거리가 된 서촌의 어느 골목, 어느 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저 난처한 표정으로만 서있던 주인이 묵묵히 큰 주전자 하나에 물을 담아 내놓았다. 지지한다는 말도, 비난하는 말도 없었다. 그저 물 한 주전자뿐이었다. 그분, 1987년 5월인가 6월에 자신의 집으로 뛰어든 사람들에게 물 한 주전자를 내주었던 그분의 지난 30년 세월은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내놓았던 공약들을 다시 살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 같았는데, 어디 두고 보자 하는 뾰족한 마음이 아니라 이제부터 우리가 제대로 감시하고, 제대로 지적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국민이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대통령은 좋은 국민에게서 나오지 않겠나.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곧바로 직무를 시작한 대통령 주변으로 훈훈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옷 벗는 것을 도와주려는 비서관에게 내 옷은 내가 벗겠다고 했다는 대통령이나, 유기견을 퍼스트독으로 입양했다거나, 고충을 해결해달라는 민원인에게 라면을 대접했다는 영부인의 얘기는 읽기에 즐겁다. 쇼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것은 물론이고, 쇼라도 이런 쇼라면 즐겁겠다는 기분이다. 그러나 이 사소하고 소탈한 행보들은 그야말로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오래 망쳐져 있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아마 집을 다시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이다. 빈터에 새로 지으면 그나마 간편하겠으나, 낡은 집을 허물고 고쳐가며 그 터에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집을 지어야 하는 일이다. 소탈함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고, 단호함과 냉정함과 엄격함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새집의 대들보가 될 공약들을 살펴본다.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겠다. 좋은 일자리까지는 안되더라도 괴롭지 않은 일자리가 만들어져야겠다. 정치권력, 권력기관을 개혁하겠다고 했다. 촛불의 민심이다. 오직 그 마음으로 대통령을 뽑은 국민들이다. 반부패, 재벌 개혁하겠다고 했고, 자주 국방력 확보하겠다고 했고, 성차별도 해결하겠다고 했다. 국방의 중요성, 그것도 자주 국방의 중요성을 후순위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가 중요할 것이다. 난마같이 얽혀있는 외교의 문제, 온갖 차별의 문제, 모두 다 어떻게가 중요할 것이다. 준비된 국민들이 ‘매의 눈’으로 살펴보고 있으니,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워야 할 것이다.

최근에 이사를 했다. 아주 작은 살림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꺼내놓고 보니 구석구석 먼지에 쓰레기에, 버려야 할 옷과 소소한 가구들에, 다시 정리해야 할 책들에, 드는 돈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이게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이사 관두고 싶었다.    

그래도 5월이라 좋았다. 미세먼지로 경보가 울려도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화창해 창 밖을 내다보며 기운을 얻었다. 구조가 다른 집으로 이사를 오다보니 다 새로 자리 잡고 정리해야 할 짐들이라 옛집에서 묻어온 먼지와 그곳에서 버리지 못하고 가져온 쓰레기들과 애지중지 아끼는 것들이 한데 뭉쳐 새로 이사온 집도 난장판이었다. 그 난장판 사이에서 한숨만 내쉬다가 자주 창 밖을 내다보았다. 새로 이사온 집의 창 밖으로는 통학로가 보인다. 아침이면 젖은 머리를 채 말리지 못한 채 등굣길을 달려가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분명히 지각일 것 같은데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세상 태평하게 걸어가는 아이도 보인다.

흐뭇하게 바라보다 다시 세월호를 생각한다. 세월호의 4월과 광주의 5월과 시청 앞의 6월을 생각한다. 지난겨울의 촛불도 생각하고, 새 대통령, 새 정부도 생각한다.

앞으로 20여일 후, 6월10일에 6·10항쟁 3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6월9일 저녁에는 시청 앞에서 이한열 열사 추모문화제도 열린다. 벌써 30년이다. 지난 30년을 아프게 살아오셨던 분들, 더 좋은 날들을 믿으며 늘 희망차게 살아오셨던 분들, 모두 다 함께하시기를 바란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서촌 골목길에서 한 주전자 냉수를 내주었던 그분도 그 자리에 계셨으면 좋겠다고 소박하게 바라본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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