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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레시피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비거니즘(veganism·채식주의) 사이트에 링크가 되었다. 요리법에 눈이 가기 전에 모니터 화면의 한쪽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스톱워치가 돌아가는 것처럼 숫자들이 정신없이 바뀌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먹거리를 위해 그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는, 정확히 말하면 도살되고 있는 소와 돼지와 닭들의 숫자였다. 그 통계가 세계적인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는 나라 단독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너무 놀라서 그만 그 사이트를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도살되고 있는 가축들의 숫자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순식간에 뼈와 가죽의 무덤이 쌓이고, 또 쌓이는 듯했다. 간혹 도로 위에서 만나게 되곤 하는 가축 운반용 트럭들이 떠올랐다. 마치 짐짝처럼 실려있는 돼지들, 그리고 닭들을 바라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슬며시 눈길을 피하는 일뿐인데, 여전히 육식을 애호하는 나로서는 고통스러워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변명이 있겠는가 싶어서였다.
8월24일 재래닭을 키우는 경북 영천시 도동 이몽희씨의 농장 닭장의 모습. 흙바닥과 모이주머니, 나무로 만든 횃대 등 닭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DDT 검출로 인해 닭들은 살처분 됐다. 우철훈 기자
한동안 해외에서 외국인들과 한 숙소에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함께 차려지는 밥상이 흥미로웠다. 열댓명이 앉은 식탁에 내용이 다른 음식이 대여섯가지나 되었기 때문이다. 특정 음식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을 위한 메뉴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다이어트 중인 사람들을 위해서도 따로 음식이 준비되었다. 이건 지나친 친절과 배려가 아닌가 싶지만, 사실 다이어트에는 미용을 위해 체중을 감량하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먹거리의 윤리, 더 나아가서는 차별과 학대에 저항하는 윤리와 철학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비거니스트들이 엄격한 채식을 하는 이유는 고기보다 선호되는 야채의 맛과 칼로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한번 더 말하거니와’ 윤리에 관한 문제이다.
한국에서 <죽음의 밥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피터 싱어의 책 원제는 <The Ethics of what we eat>이다. 역시 윤리를 강조하는 제목이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쉽게 짐작이 가겠지만 가축 사육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 생생하게 현장 묘사로 채워져 있다. 몇 장면들을 그냥 가감 없이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이런 현장 묘사 앞에서는 해석이나 감상이 불가능하다. 고통스럽다, 이외에 무슨 표현이 더 가능한가.
‘닭장 속으로’라고 소제목이 붙어있는 부분이다. 주의 사항이 표기되었다. ‘일부 독자들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한 가지 주의 사항을 더 덧붙여야 하겠다. ‘일부 독자들에게는 극도의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닭들은 죽기 전까지 삶의 20%를 만성적인 고통 속에서 보내는 유일한 가축이다. 닭들은 돌아다니지 않는데, 너무 밀집된 상태로 사육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걸을 때 관절이 너무 쑤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척추가 부러지며, 따라서 마비가 온다. 마비 상태에 빠진 닭이나 다리가 망가진 닭은 모이나 물을 먹고 마시지 못하며, 굶주림 또는 갈증으로 죽게 된다.”
“(종계들이 살이 너무 찌면 새끼를 칠 수 없으므로) 종계들에게는 식육용 닭에게 주는 모이의 60% 내지 80%를 적게 준다. 모이를 먹지 못하는 닭은 ‘과다한’ 물을 마시려고 할 것이므로, 물 역시 공급이 제한된다. 그래서 굶주린 종계들은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미친 듯이 쪼아댄다.”
더 잔혹한 묘사들이 이어진다. 그것은 닭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돼지와 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눈을 감아버리게 된다.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이걸 외면할까 아니면 대응할까, 고민하는 순간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잠깐의 순간이 다시 한번 ‘고통스러울’것이다.
동물 복지에 대한 주장은 늘 사람 복지도 요원하다는 항변에 가로막힌다. 사실이다. 이 잔혹한 가축 사육 실태는 곧 노예노동이 만연하는 노동시장을 연상시킨다. 하루 1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청바지를 만드는 동남아시아의 소녀들, 열살도 안되는 나이에 채석장에서 돌을 나르고 커피를 따는 아프리카의 아이들. 그뿐만이 아니다. 새우잡이 어선에서 노예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보다 더한 환경에서 인간 이하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시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니다. 한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다시 ‘죽음의 밥상’으로 돌아가자.
“공장식 농법은 전통식 농법보다 싸게 먹힌다는 이유에서 널리 퍼진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이 소비자에게 싼 상품을 제공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공장식 농업은 더 큰 비용, 그리고 위험을 우리 모두에게 전가하고 있다.”
저비용을 위해 행해지는 가혹한 축산 환경, 농업 환경이 결국 고비용의 위험부담으로 돌아온다는 소리다. 우리가 안전한 계란을 먹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오는 소리다. 그것은 안전한 살충제의 문제도 아니고, 정부의 깐깐한 검사 체계의 문제도 아니고, 계사의 환경을 약간이나마 개선하는 문제도 아니라 매우 근본적인 문제로 보인다. 먹는 일의 행복은 먹거리의 안전과 관련이 있고, 그것은 또 먹거리가 생산되는 현장의 안전과도 관련이 있다. 차마, 식용을 위해 죽어가는 것들의 행복한 환경을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야말로 어불성설일 터이니.
다만 최소한의 것은 챙겨야 하지 않겠나. 다만, 학대라는 말이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나.
어려서 본 소설이나 동화들 중에는 닭 잡는 장면이 나오는 것들이 많았었다. 그런 시절과 가깝게 살았던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당에서 키우는 닭, 그 닭을 잡기 위해 벌어지는 소동, 소년과 소녀의 경악, 혹은 눈물. 그러나 마침내 따듯한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
이런 풍경을 도무지 접할 가능성이 없는 현대의 식탁이다. 그러나 여전히 따듯하기를 바란다. 안전할 뿐만 아니라 따듯하기를.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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