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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날이란 게 있는 줄 몰랐다. 지난 20일이 바로, 유엔에서 제정한 세계 행복의 날이란다. 제헌절이나 한글날, 삼일절 같은 날들처럼 역사적으로 뭔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걸 기념하기 위해 만든 날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날은 역사적으로 아주 행복했던 어떤 사건을 기념하는 날일 터이고, 사람들의 마음도 그 기억과 함께 흐뭇해졌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살펴보니, 이날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복지와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국제연합에서 제정’한 날이라고 되어 있고, 관련 정보로는 세계 행복 보고서가 보인다.
행복의 조건을 수치화해서 순위를 매겼을 때, 우리나라의 순위가 아주 한참 아래이다 못해 거의 바닥 수준이라는 건 이제 새삼스러운 뉴스도 아니다. 그 구체적인 예들로 청년실업률, 노인빈곤율, 출산율 등이 제시되기도 했다. 다 새삼스럽지 않은 뉴스들이다. 간신히 청년실업을 면했다고 해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엄두를 내기에는 턱없이 적은 임금과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야 한다. 혹시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거나, 그런 사람을 구할 돈이 없고,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럴수록 그들이 어깨에 메고 살아가야 할 노년층의 두께는 두꺼워지고, 가난해지는 식이다.
야근이 많은 회사에 다니는 젊은 친구에게 결혼 계획을 물었더니, “회사에서 집엘 보내줘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겠지요”라는 농담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출산율을 따지기 전에 결혼하고 출산할 수 있는 조건을 따져야 한다는 소리다. 행복수치를 따지기 전에, 행복한지를 묻기 전에, 행복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나 역시, 다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는 말은 이제 아주 유명한 말인 듯하다. 심리학자가 한 말이기도 하고,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의 연구결과라고도 한다. 독일의 연구자들은 그걸 확인해보기 위해 웃음 근육을 마비시키는 보톡스를 주사하고 뇌반응을 측정해보기도 했단다. ‘웃음의 숨겨진 힘’에 대한 TED 강연에서 들은 말이다. 이 강연 중, 자궁 안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태아의 초음파 사진이 보인다. ‘우리는 사실 선천적으로 미소짓도록 태어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실 선천적으로 행복하려고 태어났다는 것’일 터이다. 같은 TED 강연으로 아주 유명한 에이미 쿠디(Amy Cuddy)는 보디랭귀지의 힘을 말하면서, 마음이 몸을 만드는 게 아니라 몸이 마음을 만든다고 말한다. 주눅든 자세로 있으면 약해지고, 센 척하면 세진다는 것이다. 대개의 생각과는 반대다. 약하니까 주눅이 들고, 가진 게 없으니까 센 척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심리학과 과학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착각과 자기 세뇌의 문제가 아니라, 뇌와 그에 작용하는 호르몬의 문제라는 것이다.
문학은 어떤가? 문학은 관계에 대해 집중한다. 사람과 사람의 개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역사와의 관계를 포괄한다. 나의 이야기가 단지 나의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나이면서 동시에 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센 척하는 자세를 해서 개인의 지배 호르몬 혹은 행복 호르몬을 발생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관계를 행복하게 만들거나, 혹은 관계 속에서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예컨대 내가 대한민국의 출산율을 고민하는 아주 건강한 20대 여성이라면, 출산은, 단지 건강한 호르몬을 바탕으로 하여 아이를 낳는 문제인 것이 아니라, 월수입, 노동시간, 직장의 구조와 상사의 성격, 사회적인 보육시설의 안전도와 신뢰도, 부모님의 경제력과 건강, 심지어는, 아랫집 주민의 층간소음 반응까지도 미리 신경써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에 비해서는 훨씬 비관적이지만, 그래도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건 문학이다.
탄핵이 인용된 후 광화문 촛불집회는 특별했다. 나로서도 그 집회는 매우 각별한 경험이었는데, 행복한 집회의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소위 386세대라고 불리는 사람의 하나로서 내가 생각하는 시위나 집회의 정의는, 다치고, 죽고, 검거되고, 투옥되는 일들의 총합쯤으로 여겨졌다. 말하자면 정말로 피를 흘리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었고,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끈 원동력이 된 1987년 6월항쟁만 하더라도,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 전에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구도 다치고 검거되지 않고 투옥도 되지 않았는데, 그날 촛불집회의 구호는 ‘승리’였다. 실은 ‘행복’이라고 바꿔 말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날의 참가자들은 일부러 센 척할 필요도 없이 이미 셌다. 그 호르몬은 우리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억 세포로 전이되어 개인의 역사가 되고, 사회의 역사가 될 것이다.
서울시가 촛불집회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도록 지원하기로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나는 그 자긍심이 좋다. 역사는 피를 흘려야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뜻을 모으면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그런 자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보탤 수 있다는 것, 그 소박함의 엄청난 힘이 좋다. 시위가 축제가 될 수 있고, 축제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무소불위인 줄 알았던 자리에서 밀어낸 것보다 더 큰 승리는 바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앞으로 정권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는 모르지만, 촛불을 완성하는 정권이 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장미대선’이라는 말이 참 좋게 들린다. 덩굴장미처럼 행복을 마구 피워내는 그런 정권이 들어서야겠다. 그러려면 잘 지켜봐야 할 일이다. 4년 전의 실수를 다시 해서는 안 될 터이니. 대선까지 모두들 어깨를 활짝 펴 긍정 호르몬을 마구 발산시키시기를 바란다. 정치나 권력은 그 속성상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를 감시하는 힘은 국민들에게 있어 보인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는 게 아니라, 바람과 함께 타오르는 힘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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