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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4일,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가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쪽으로 결론이 나자 온 세계가 화들짝 놀라고, 온갖 미디어가 폭포처럼 분석·논평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흥분상태가 가라앉는 듯하지만, 여전히 세계의 언론들은 ‘브렉시트’ 사태의 추이와 전망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문제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극히 당연하다. 브렉시트란 유럽의 중핵 국가가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주의적’ 연대체로부터의 이탈을 결정한 엄청난 사건이니 말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운데)가 6월 27일(현지시간) 런던의 하원에 출석해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런던 _ AP연합뉴스

실제로 브렉시트는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한,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령 세계 현실을 ‘아래에서 위로’ 보는 데 익숙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무엇보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지난 수십년간 세계 전역의 민초들과 자연세계를 난폭하게 짓밟고 유린해온 신자유주의의 횡포에 대한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와 항변의 표출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이런 반응이 나왔다는 게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세계의 주류언론은 이 점에 주목하기보다는 국민투표에서 ‘탈퇴’ 쪽에 몰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진 주요 계층, 즉 (자신들의 경제적 곤경이 이민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하층민들의 ‘무지’와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 정서를 비웃고, 또한 그러한 ‘어리석은’ 대중적 정서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야심가들을 규탄·비판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의 연장선에서 상당수 언론인·지식인들은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민주주의의 실패’를 거론하고 있다. 영국이라는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중차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데 국민투표라는 ‘직접민주주의적’ 방식을 채택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번 사태가 명확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성립돼야 있다. 즉 유럽연합 탈퇴 결정이 과연 ‘잘못된’ 선택인지가 확실할 때, 그리고 현행의 국민투표가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제도라고 인정할 수 있을 때이다. 이 두 가지 전제조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브렉시트를 비난하고,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 자신의 선입관과 편견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영국의 이번 국민투표는 결함이 없는 게 아니었다. 투표가 시행되기 전 영국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한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갈라져 들끓었고, 그 과정에서 이성적인 토론보다 격정적인 주장들이 난무했다. 따라서 일반시민들이 현안을 충분히 숙지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온갖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사실상 발언권을 독점했던 것은 하층민이 아니라 지배층 엘리트들이었다. 물론 ‘탈퇴’를 외치는 보수 혹은 극우파 정치가들의 목소리도 컸지만,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엘리트 정치가, 지식인, 언론인들은 유럽연합 탈퇴의 부당성과 무모함을 줄기차게 말했다. 그런 점에서 극우파 정치꾼들의 선동에 ‘무지한’ 대중들이 휘둘렸다고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도 않고, 또 대중(하층민)을 깔보는 발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번 국민투표의 정작 중요한 문제점은 따로 있다. 그것은 투표율 72.2%에 51.9%의 지지로 탈퇴가 결정됐다는 사실이다. 단순 다수결 원칙으로는 탈퇴파의 승리임이 분명하지만, 투표권자 전체를 고려하면 탈퇴 쪽 득표는 그 비율이 36%도 안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국 국민의 ‘압도적인’ 선택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진 국가 중대사를 이런 식으로 결정하는 게 과연 옳으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고, 그 물음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지금 ‘예상 밖의’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언론들이 호들갑을 떠는 분위기 속에서 주로 런던 등 대도시 주민들 사이에 국민투표를 다시 하자는 여론이 끓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과 같은 국민투표는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현안에 대한 충분한 토의와 숙의 과정을 결여하고 진행되기가 쉽고, 그 결과로 국가 구성원들의 ‘일반의지’가 정당하게 표현될 수 있는 제도로 인정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국가의 중대사는 ‘대표자들’에게 위임해서 그들이 의회나 정부에서 결정하도록 하고, 국민투표와 같은 위험한 ‘직접민주주의’ 제도는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과연 사리에 맞는 일일까?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게 있다. 즉 그동안 소위 대의제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이 세계의 부를 1%가 독점을 하고 그들의 지배 밑에서 99%의 인간이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이처럼 암울한 상황이 만들어졌겠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세계 전역에서 대의제 정당정치는 작동불능 상태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가 직면한 온갖 엄중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사실상 최대의 걸림돌이 되어 있다.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의제민주주의가 다수 민중의 요구를 대변하기는커녕, 극소수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대변·관철하는 수단으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정당정치, 대의제민주주의라는 것은 말일 뿐이지 실질적으로 오늘날 정치는 금권정치로 변질된 지 오래다. 이 금권정치의 주역이 자본가들과 정치가계급,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지식인, 학자, 언론인 등 소위 엘리트들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00년 전,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는 <대중의 반역>이라는 책에서 문화와 전통을 모르는 어리석은 대중이 민주사회를 파괴하고 있다고 개탄했지만, 미국의 사회사상가 크리스토퍼 래시는 1990년대 중반에 쓴 글 <엘리트의 반역>에서 오늘날 ‘세계화’ 시대의 민주주의의 적은 엘리트들이라고 진단했다. 래시에 의하면, 옛날의 귀족들이 (전부는 아니라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공동체를 걱정하며 귀족으로서의 책임감을 자각하고 있었음에 반해 오늘의 엘리트들이 충성을 바치는 것은 지구적 차원의 (자본이 주도하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을 길러준 향토, 지역, 풀뿌리 이웃들의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겉돌고 있다. 지금 민주주의의 적은 민초들이 아니라 엘리트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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