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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을 들었을 때 아, 아까운 사람을 또 잃었구나 하는 몹시 허전한 느낌이었다. 특별히 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할 만한 개인적 인연이나 기억은 없다. 오래전 돌아가신 정치학자 (잠깐 국회의원으로 활동도 했던) 이수인 교수댁에서 딱 한 번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지만, 그와 우정을 나눈 적이 없다. 게다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완역한 <자본론>이나 그의 저서를 꼼꼼히 읽어본 적도 없다. 단지 그때그때의 필요 때문에 그 저술의 일부를 뒤적이거나 그가 쓴 신문의 칼럼을 흥미롭게 읽어봤을 뿐이다.

우리 세대는 <자본론>을 통독하거나 충실히 읽은 경험자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보다 10년 정도 위 세대는 예전 일본 학자들이 번역한 <자본론>을 읽는 게 가능했겠지만, 해방 후 오로지 한글로 글을 읽기 시작한 세대들에게는 (예외는 있겠지만) 일본어 해독력이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광적인 반공체제 속에서 무슨 판본이건 <자본론>을 구해서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욱이 나와 같은 문학전공자에게는 설령 <자본론>을 어렵사리 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어낼 재간이 없었다. 실제로 내 경우, 30대 후반에 미국에 가서 두 학기를 보내며 도서관에서 <자본론>을 빌려 틈틈이 읽어보려고 했으나 그게 문학이나 역사책을 보듯이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학생 시절에 서양경제사상사를 겉핥기로 읽은 밑천으로 낯선 용어가 끊임없이 출현하는 <자본론>을 혼자 독파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 책에서 그나마 내가 쉽게 이해하거나 흥미를 느낀 대목들은, 예컨대 밀가루가 아니라 석회가루가 잔뜩 섞인 빵으로 근근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었던 초기 산업시대 노동자나 빈민들의 참상에 관한 생생한 묘사들이었는데, 사실 그런 기록은 블레이크나 디킨스를 읽으면서 내가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기록에 접하기 위해 굳이 <자본론>이라는 난해하고 두꺼운 텍스트를 읽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이후 <자본론>에 대한 내 관심은 시들해져버렸고, 그 결과 나는 오히려 원전 자체보다 그것에 직간접으로 연관된 2차 텍스트들을 더 많이 보면서 지내왔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명색 지식인이라면서 한 번도 <자본론>을 통독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물론 <자본론>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훌륭한 안내자의 도움을 받으며 이 고전을 충실히 읽은 지식인이 많은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분위기’가 다를 것이고, 그 차이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성격과 수준을 좌우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도 적잖은 독자가 있는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언젠가 자신의 지적 생애가 마르크스를 축으로 영위돼왔음을 말하고, 그 까닭의 하나로 학부생활의 경험을 들었다. 즉, 그가 경제학부에 다니던 학생 시절에는 <자본론>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지 않으면 학점을 딸 수 없는 학풍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십년이 지난 뒤에도 그는 <자본론>의 상당 부분을 대충 페이지까지 기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_경향DB




하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지적·학문적 분위기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자유로웠다. 일본은 냉전체제 속에서 군사적·외교적으로 사실상 미국의 종속국이라는 처지를 면할 수 없었지만,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서는 제약이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 이전에 잠복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던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관한 연구가 아마도 세계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게 대략 1970년대 말까지의 일본 지식사회의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컨대 일본의 ‘엘리트’들을 양성·배출하는 도쿄대학을 위시한 주요 고등교육기관에서는 학부 때부터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읽고 배우는 것은 거의 필수적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지만, 전후 일본은 장기간의 자민당 일당 지배체제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정책에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꽤 내포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적어도 몇십년 동안 일본 사회는 빈부격차가 작은 안정되고 평화스러운 사회로 존립할 수 있었고, 세계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주요 정치가, 고위 공무원, 대기업 간부들 중에 대학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으로 ‘좌파적’ 현실인식과 세계이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유력한 설이 있다(실제로 자민당에는 오랫동안 우익 이외에 좌익 성향의 정치가들도 존재했다).

일본의 경우는 비근한 예에 불과하다. 어떤 사회든 사상, 학문, 언론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고, 다양한 각도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관점들이 풍부히 존재할 때, 그 사회는 인간적으로 살 만한 사회가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일본의 정치와 사회는 퇴영적인 기류가 지배적이지만, 적어도 일본 사회가 전반적인 안정과 평화를 누리며,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 지식인, 작가, 학자들을 출현시킨 시기는 마르크스(주의) 사상 혹은 경제학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와 일치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풍요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정신은 이단적 사상이나 ‘불량정신’이 폭넓게 허용되는 상황에서만 왕성히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수행 교수의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마르크스 연구에 일생을 걸었고, 그 성과를 (우여곡절 끝에, 운 좋게도) 종래에 ‘사상과 학문의 자유’라는 게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던 한국의 제도권 대학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그 덕분에 이제 마르크스 사상 연구는 이 땅에서도 어쨌든 시민권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완역한 <자본론>을 시민적 교양을 위한 자양분으로 쓰기 위해 끊임없이 쉬운 말로 해설서를 쓰고 시민강좌를 열었다.

게다가 제자들이 쓴 추도문을 보면, 그는 또 학생들을 지독히 아낀 스승이자 참으로 소박한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진짜라는 (지금 한국 사회가 완전히 잊고 있는) ‘진리’를 몸으로 가르친 드문 교육사상가이기도 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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