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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칼바람처럼 싸늘하고 날카로운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배우 김주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訃音)이다. 한낮의 도심에서 그가 탄 차량은 앞차와 경미한 충돌 후 인도로 돌진해 아파트 단지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난간이나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출 수도 있었을 텐데, 야속한 네 바퀴는 하필 계단 아래를 향해 굴러갔다. 불운이고 또 비운이다.

동료 연기자와 영화인, 방송인들은 물론이고 스크린과 TV를 통해 그의 모습을 오래 봐왔던 국민들까지 모두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불과 사흘 전 한 시상식에서 “연기 생활 20년 만에 처음 상을 받는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 주신 것 같다”며 상기된 얼굴로 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감격하던 사람이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죽음은 늘 반걸음 뒤에서 삶을 따라온다. 우리는 모두 살면서 죽고, 죽으면서 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배우 김주혁의 연기를 처음 본 것은 영화 <싱글즈>에서였다. 그를 세상에 알린 드라마 <카이스트>를 보지 못한 탓에 그가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이미 나타내던 무렵에야 김주혁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이후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그가 연기한 소심한 남자 ‘광식’에게 나를 투영하면서, 그는 내 이십대의 한 자화상이 되었다. 영화 속 광식이처럼 짝사랑만 하며 연애 한 번 못하던 시절이다.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역할은 <청연>에서의 ‘한지혁’이다. 동경 유학생인 지혁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훗날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조종사가 되는 ‘경원’(장진영 분)과 사랑에 빠진다. 행복의 나날도 잠시, 일본 정부 요인 테러 사건을 주도한 저격범과 친구 사이라는 이유로 지혁은 물론 경원까지 함께 끌려 가 모진 고문을 받는다. 지혁은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조선적색단원’이며 경원은 그 일과 무관하다는 허위 자백을 하고 홀로 사형 당한다. 그러나 지혁의 유골을 품에 안고 조선을 향해 비행하던 경원마저 추락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주검이 되면서까지 연인을 지키려 했던 지혁의 처절한 눈빛과 경원이 사라져 간 서쪽 하늘 석양이 지금까지 뇌리에 박혀 있다. 극중에서처럼 두 주연배우 모두 짧은 생을 살다 세상을 떠났기에 더욱 가슴 아프게 기억되는 영화다.

김주혁은 진지하고 열정적인 연기자였다. 우리는 그가 연기한 인물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울고, 웃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감격하고, 억울해하고, 두려워하고, 용기 내는 얼굴들을, 소심하고 못난 형을, 희생적인 남편을, 매력적인 연인을, 옆집 아저씨를 보았다. 연기가 아닌 인간 김주혁을 좀 더 볼 수 있던 예능 프로에서는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는 따뜻하면서 유쾌하고 또 진솔했다. 20년간 활동한 배우로서, 또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그는 우리 기억 속에 다양한 ‘얼굴’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마치 여러 이웃들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난 것만 같은 슬픔과 황망함이 몰려왔다.

시간은 무심하게 빠르며, 세상은 끝없이 분주하다. 중요한 일들로 넘쳐나는 우리 일상은 금방 슬픔의 자리를 떠났다. 실시간 검색어에서 그의 이름이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는 또 다른 영화와 배우들에게 환호한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추모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동물원’의 김창기가 김광석 죽음 이후 만든 노래 ‘나에게 남겨진 너의 의미’가 떠오른다. “또 나의 삶은 아주 말끔히 포장되고, 우리의 추억은 멀어지고, 모두 제 갈 길을 떠나고, 아침 출근길에 문득 너의 노래를 들으며 아주 짧은 순간 호흡이 멈춰질 듯하지만, 난 단지 날 가끔 내가 원하던 대로 봐주던 널 잃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인 걸.” 우리가 보길 원하는 다양한 사람의 얼굴을, 울고 웃으며 최선을 다해 보여주던 이를 잃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병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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