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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운동과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시대정신은 뭘까. 역사학자 강만길은 3·1운동이 참가 인원과 전국적 규모를 생각할 때 그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거족적인 운동’이었다고 말한다. 조선 민족이 식민 통치를 달게 받는다고 주장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선전이 허구임을 지구상에 널리 알리고, 민족 자결과 국가 주권을 당당히 요구했던 ‘근대적·국민적 민족해방운동’이 바로 3·1운동이었다.

이러한 3·1운동의 열망을 담아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3·1운동의 정신은 이날 선포된, 10개 조항으로 이뤄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반영됐다.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고,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이다. 그리고 제4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信敎),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信書),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이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공화국이 바로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시대정신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민주’와 ‘공화’가 결합한 ‘민주공화제’란 말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헌법에 사용된 것은 1920년대 이후라는 점이다. 유럽의 경우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헌법에서, 중국의 경우 1925년에야 헌법 문서에서 민주공화국이란 용어가 쓰였다고 한다. 역사학자 박찬승이 지적하듯,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란 표현을 쓴 것은 선구적이고 독창적인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신은 1948년 제헌헌법에서 다시 강조됐고, 1987년 87년헌법까지 그대로 계승됐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독립운동가 조소앙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다. 조소앙은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몽테스키외를 따라 귀족 주도의 ‘귀족공화제’에 대비되는 평민 중심의 ‘민주공화제’를 부각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민주공화국이란 말에는 국민이 주인인 공화국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은 대한 ‘제국(帝國)’이 아니라 대한 ‘민국(民國)’이란 말에서 이미 천명된 것이기도 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공화국’의 의미다. 공화국을 지탱하는 철학은 공화주의다. 공화주의는 덕성을 갖춘, 공공성에 헌신하는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사회 발전이 이뤄진다는 것을 핵심 이념으로 한다. 또 공화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비판한다. 자유주의가 타인의 간섭으로부터의 ‘소극적 자유’를 중시한다면, 공화주의는 스스로를 지배할 때 진정으로 자유로운 ‘적극적 자유’와 사회 구성원으로 동동한 권리를 누리는 ‘비지배적 자유’를 강조한다.

‘공화국(republic)’이란 말의 기원을 이룬 라틴어는 ‘레스 퍼블리카(res publica)’다. 레스 퍼블리카는 그리스어 ‘폴리스(polis)’에서 유래했다. 한 사람이 지배하는 곳은 폴리스가 아니라고 노래한 이는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였다. 공동의 법과 이익에 의해 결속된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곧 레스 퍼블리카, 다시 말해 공화국이라고 주장한 이는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였다. 이처럼 공화국의 이상은 개인이나 소수가 아닌 시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동체 만들기에 있고, 이러한 정신이 우리 역사에선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오롯이 반영돼 있다. 지금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올해 2019년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바로 ‘민주공화국 100년’에 있다는 점이다. 민주공화국의 핵심이 국민이 주인이 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실현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난 100년을 돌아볼 때, 3·1운동으로 본격화된 민족해방투쟁은 1945년 광복으로 이어졌고, 광복 이후 새로운 나라 세우기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도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토는 분단됐고,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통한 통일시대 개막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는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민주공화국 100년을 맞이한 현재, 대한민국이 놓인 자리는 우리 사회가 처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고려할 때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과거 100년과 미래 100년이 교차하는 오늘날, 새로운 100년을 향한 시대사적 과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양대 과제가 ‘나라 풍요롭게 하기’와 ‘한반도 평화·번영’에 있다고 보고 싶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민주공화국 100년으로 향한 첫발을 내딛는 2019년 올해의 화두가 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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