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동료 선생님들과 저녁식사를 한 후 일할 것이 더 있어 학교로 되돌아온 늦은 밤이었다. 복도에 선 채 그중 한 분과 남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편에서 한 학생이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평소와 달리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었나, 마음에 걸렸다.

잠시 후 내 방으로 가려는데 “교수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친구였다. 상의드릴 게 있다고, 잠시 시간 내어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곧장 연구실로 함께 갔겠지만, 마침 그날 저녁 식탁에서 학생들 면담 시 주의할 지침들이 화제가 되었던 터라 멈칫했다. 학생 상담 시 방문을 열어두라, 이성 학생의 경우에는 반드시 둘씩 짝지어 오도록 해야 한다더라, 민감한 내용이면 만일을 대비해서 동의를 구하고 녹음하라 등의 이야기가 오갔던 것이다. 그건 학생을 ‘선생을 무고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원’으로 보는 비교육적 처사라며 절대 나는 그렇게 안 할 거라 반발했으면서도, 막상 그 순간에는 아까 들은 주의사항들이 떠올라 주저하게 되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이라 답하려다 학생과 눈을 마주친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항상 서글서글했던 그 친구의 눈길이 고통스럽고 절박해 보였다. 뭔지 모르지만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내일 다시 찾아오라 하면 듣지 못할 것임을, 영영 내게는 들려주지 않으려 할 것임을 직감했다. “집으로 가시는 길이면 걷는 동안이라도 말씀드리면 안될까요?” 학생이 재차 청하였다. 원고 작업은 다음날로 미루기로 하고 “그러자” 응하였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적요한 밤에 교정 한쪽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들었다.

법적 쟁점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어 그런다며 학생은 말문을 떼었다. 하지만 한참 들어보아도 해당 사안은 법률조언을 구할 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무척 고통스러운 일임은 맞았으나 그 친구의 신상에 직결된 사안이 아니었고, 우리 학내 문제 역시 아니었다. 그러니 ‘법교수님’으로서도, 학과 교수로서도 내가 제시할 해결책은 마땅히 없었다.

위로든 조언이든 들려주어야 할 것 같았지만, 한마디라도 부주의하게 내뱉으면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 같아진 그 친구의 마음에 쨍그랑 금이 그어질까 두려웠다. 맞갖은 어휘와 표현들을 조심스레 고르고 이리저리 배열하는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다음 순간, 학생의 표정에서 타인에게 내보이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속내를 털어놓은 이후 밀려드는 참담한 평온함 같은 것이 읽혔다. 그때 알았다. 이 친구는 지금 위로나 조언을 구하려는 게 아니구나. 누구한테도 말 못한 채 품고 있던 내면의 무거운 돌덩이를 감내하기 힘들어, 상담으로나마 꺼내어 보이고 싶었던 것이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학생이 겪고 있을 고통의 크기나 밀도는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거기에 오롯이 공감하긴 어려웠다. 그렇지만 상의한다는 구실을 빌려서라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간절함만큼은 무엇인지 온전히 알았고, 또 공감했다. 말한 다음 순간 밀려드는 참담한 평온함에 대해서도.

고르고 다듬던 조언의 문장들을 버렸다. 대신 밤늦게 불쑥 찾아와 이런 이야기해서 죄송하다던 그 친구에게 “고마워”라 답했다. 어쩌면 나는 네가 필요로 할 조언을 다 못 줄 테지만 그런 내게 네 이야기를 들려주어 참말로 고맙다고. 나는 네게 좋은 상담자 역할을 못한 걸 미안해하지 않을 테니 너 또한 내게 한밤에 찾아온 걸 미안해하지 않기로 하자고. 네가 말함으로써 조금이나마 후련해진 만큼 나도 ‘듣는 귀’가 되어주어 기쁘다고.

그가 짊어진 돌덩이를 내가 얼마나 덜어줄 수 있을지를 떠나, 적어도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것이 그에게 자책의 돌멩이를 하나 더 얹는 일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상의드릴 것이 있다며 찾아가 돌덩이를 꺼내놓던 나로 인해 놀랐을 누군가에게 이해되었기를 빌었다. 저마다의 돌덩이를 짊어진 채 사회적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나와 그대들이 새해에는 때때로 테두리를 뜯고 서로에게 ‘듣는 귀’가 되어주기를, 또 거기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가 되어가기를 소망한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