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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사회학은 내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분야다. 아직 두 달 정도 남아 있지만 2018년은 내게 지식인 최인훈과 김윤식이 세상을 떠난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사상이 나의 사회학적 연구에 미친 영향이 컸다. 단언컨대, 최인훈과 김윤식은 광복 이후 한국 모더니티를 탐구해온 가장 뛰어난 작가이자 가장 탁월한 국문학자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도 두 사람의 지적 모험을 통해 한국 모더니티의 과거와 현재를 반추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모더니티란 16~17세기 서유럽에서 시작해 지구적으로 확산된 사회제도와 의식을 말한다. 제도로서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의식으로서의 개인주의와 민족주의는 이 모더니티의 중핵을 구성한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서 19세기 후반부터 부여된 시대사적 과제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민족주의가 바탕을 이룬 ‘근대적 국가와 사회 만들기’였다. 우리는 어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어떤 개인주의와 민족주의를 일궈온 걸까. 소설이든 평론이든 문학의 힘이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을 구하는 데 있다면, 최인훈과 김윤식은 바로 이 문제를 평생 천착해 왔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사멸했습니다. (…)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명준이 북한에서 발견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말들이다. 이 구절들은 광복 이후 4월혁명까지 남과 북의 현실을 날카롭게 전달한다. 살아 있되 이기적 욕망만 넘치는 사회와 혁명을 앞세우나 인간은 죽어 있는 사회, 다시 말해 ‘광장 없는 밀실’(남한)과 ‘밀실 없는 광장’(북한)은 1950년대 한반도에 존재한 두 자화상이었다.

소설 <화두>는 <광장>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인훈의 한 정체성인 <광장>의 주인공이 남과 북을 관찰했다면, 또 다른 정체성인 <화두>의 주인공은 이제 미국과 소련을 여행한다. <화두>의 화두는 민족의 재발견이다. <화두>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낯선 미국 땅에서 이뤄지는 민족과의 조우다. 버지니아에서 우연히 만난 한 도지(道誌)에 실려 있는 ‘장수 잃은 용마의 울음’이란 아기장수 설화는 최인훈으로 하여금 민족을 재발견하게 하고 그리운 조국으로 결국 돌아오게 한다.

최인훈이 뛰어난 작가인 까닭은 광복 이후 한국 모더니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남과 북의 분단 시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를 깊이 있게 성찰했다는 데 있다. 분단과 냉전은 지난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사를 규정해온 두 겹의 시대적 구속이다. 이러한 구속 아래 모더니티의 제도와 의식인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민족주의가 어떻게 변동해 왔는지를 최인훈은 생생히 재현하고 조명한다. 문학평론가 김현과 국문학자 김윤식이 ‘한국 문학사’에서 최인훈을 ‘전후 최대의 작가’라 평가한 것은 결코 과찬이 아닌 셈이다.

김윤식의 관심은 우리 사회에서 모더니티란 무엇인가에 맞춰져 있다. 이 물음은 사실판단의 질문이자 규범판단의 질문이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김윤식은 지난 20세기 한국 모더니티가 자본주의, 국민국가, 민족주의, 전통주의의 십자 포화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고 파악한다. 그는 이러한 모더니티의 제도와 의식이 소설과 비평 등 문학에 어떻게 담겨 있었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200여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더없이 고독하면서도 고통스러웠을 그의 지적 탐험을 직접적으로 증거한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한국 모더니티는 서구와 다른 경로로 진행돼 왔다. 한국 자본주의는 압축적 산업화였고, 한국 민주주의는 보수적 민주화였다. 한국 개인주의는 공동체주의에 압도돼 빈곤했으며, 한국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한국 모더니티는 그 출발부터 외부로부터 이식된 과정이었던 동시에 ‘한국적 표준’을 창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광수와 임화 해석에서 이청준과 박완서 비평에 이르는 김윤식의 방대한 문학 연구들은 바로 이 한국 모더니티의 계보학에 대한 인문학적 탐색이었다.

최인훈 선생은 2008년 <최인훈 전집>을 펴내면서 <화두> 제1권 말미에 나의 사회학적 비평인 졸고 ‘관념의 세계시민과 현실의 세계시민’을 싣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김윤식 선생은 2002년 교수신문에 실린 나의 짧은 에세이인 졸고 ‘그람시와 김윤식’을 읽고 따로 연락해 격려해주셨다. 규범판단의 차원에서 공정한 시장경제, 성숙한 민주주의, 연대적 개인주의, 개방적 민족주의는 한국 모더니티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심층적 탐구와 현실적 구현이 나를 포함한 후학들에게 부여된 과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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