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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의 다른 이름은 ‘대침체(Great Recession)’다. 대침체는 1929년 ‘대공황’에 빗댄 말이다. 장기적 경기 침체를 뜻한다.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은 대침체를 알렸고, 대침체는 유럽 국가들의 부채 위기로 이어졌다. 1980년대 이후 표준적 세계관으로 군림해온 신자유주의는 고장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대침체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을 상징하는 사건은 2011년 ‘점령 시위’였다. 뉴욕, 런던, 프랑크푸르트, 도쿄, 그리고 서울 등에선 동시다발 시위가 일어났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구호는 익숙했던, 그러나 불편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 성장이 둔화되고, 불평등이 강화되며, 크고 작은 금융위기가 반복해 발생하는 ‘뉴 노멀’의 시대가 열려온 셈이었다.

돌아보면, 전후 서구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이 케인스주의 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변화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선도적으로 이끈 것은 금융자본이었다.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처럼 전 지구를 넘나들며 탐욕스럽게 이익을 챙겨온 금융자본은 ‘20 대 80 사회’를 창출했고, 다시 ‘1 대 99 사회’를 만들어왔다. 불평등에 대한 대처는 어느 나라든 주요 정책 목표가 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을 선구적으로 비판한 이는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었다. 크루그먼은 1980년대 이후 미국사회를 두 번째 ‘금박 시대(Gilded Age)’라고 명명했다. 마크 트웨인과 찰스 워너가 함께 쓴 소설 제목에서 따온 금박 시대란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곪아 있는 시기를 함의했다. 고도성장이라는 화려한 표층 아래 빈부 격차라는 어두운 심층이 결합해 있던 시대가 금박 시대였다.

불평등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이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였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더 높다면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지고, 결국 소득분배가 악화된다는 게 피케티의 논리였다. 피케티는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의 증가에 주목하고, 21세기 자본주의 미래를 우울하게 전망했다.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인구 성장과 기술 진보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저성장이 지속되고, 그 결과 자본의 소득 몫이 커지며 그 힘이 더욱 강력해지는 ‘세습 자본주의’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게 피케티의 주장이었다.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이러한 견해에 반론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불평등은 앞서 말했듯 금융위기 이후 경제와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적 화두가 됐다. 2014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는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심각한 소득 불평등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불평등 증가가 경제성장에 압박을 가하고 불안정을 부추긴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결과가 미국 ‘샌더스 현상’에서 이탈리아 ‘오성운동 돌풍’에 이르는,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정치적 포퓰리즘의 부상이었다.

최근 세계 경제는 대침체가 가져온 경제 위기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 1월 출간된 세계은행(World Bank)의 ‘세계 경제 동향 2018’ 보고서는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성장 둔화가 우려되지만, 투자와 무역은 회복되고, 재정은 건전하며, 신용은 개선돼 왔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지구적 경제 상황은 나라에 따라 고르지 않은 편차를 드러내고 있다. 더하여,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와 중국의 부채 증가, 그리고 미·중 간 무역전쟁 등 역시 눈여겨봐야 한다.

역사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체제 전환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한다.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 언제쯤 불확실성의 터널에서 빠져나올지를 예견하긴 어렵다. 이 뉴 노멀의 세계 경제에서 세 가지 경향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정보사회의 진전이 비가역적인 한, 경제의 지구적 네트워크는 더욱 촘촘해지고 긴밀해질 것이다. 둘째, ‘인더스트리 4.0’ ‘소사이어티 5.0’ 또는 ‘제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인공지능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과학기술혁명이 경제는 물론 사회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분배와 복지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않으면 불평등은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1929년 대공황을 극복하게 한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의 ‘대압착(Great Compression)’ 정책이었다. 부유층과 빈곤층 간의, 노동계급 안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대압착이 포스트신자유주의로 가는 경제와 사회의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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