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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다룬 문학작품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하다. 격정적이고 숭고한 사랑을 보여준 <로미오와 줄리엣>, 끝내 스스로를 파괴시킬 수밖에 없었던 한 젊은이의 사랑을 묘사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소나기>의 풋풋하고 순정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사랑을 다룬 문학작품을 만날 수 있다. 기이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경우 등장인물 대부분이 죽는다는 점이다. 로미오도 죽었고 줄리엣도 죽었다. 베르테르도 죽었고 윤초시댁 증손인 소녀도 죽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이 죽음이라는 플롯을 애용한 것도 하나의 이유이겠지만 결국 죽음이 아니고서야 진정한 사랑을 드러내기가 묘연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서였으리라.

다시 말해 현실 혹은 삶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지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랑을 다룬 문학작품이야말로 사실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다룬 것이며 사랑에 대한 이 비극적인 인식이야말로 우리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진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태초에 사랑이 있었네> 역시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다만 이 소설의 인물들은 기대한 것만큼 숭고하거나 격정적이지도 않고 우아하거나 은근하지도 않다. 원하는 것을 소유해보지 못한 적이 없는 부유한 사내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 여자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 여자는 사내에게 사랑을 바랐으나 사내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대로 여자를 대한다. 여자가 떠난 뒤에야 사내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깨닫게 되며 진정한 사랑을 찾아 모든 걸 버리고 길을 나선다. 여기까지는 진부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질 만큼 익숙한 사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남다른 점은 바로 그 뒤의 상황인데 사내는 작은 항구 도시 술집에서 작부로 일하는 여자를 찾아내고 매일처럼 그 술집을 찾아간다. 여자는 사내를 구박할 뿐만 아니라 버러지 취급을 하며 온갖 모욕을 주지만 사내는 이 모욕을 참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으며 꿋꿋이 자리를 지킨다. 독자로서 이 사내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내가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 역시 이전에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독선적이며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사내의 태도는 아름답다기보다 섬뜩하다. 집요함과 절박함은 있으나 사내는 여전히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 사내를 비난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통째로 지불하려 한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단 한 번도 소유해 본 적 없는 무리에 속했던 사내가 그 무리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사내는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을 해낸 셈이며 그런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 진상규명을 외치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친구를, 선생님을 잃고 남겨진 이들의 시간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참사를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패러다임과 대결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이들은 지금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고 있다. 학살과 다름없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해달라는, 책임자를 처벌해달라는 요구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는 신념을 지닌 대통령부터 국무총리를 비롯해 이 시대를 떠받치는 패러다임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요구는 패러다임의 전면적인 해체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렇지만 패러다임과 대결을 벌여야 하는 그이들은 무척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이들은 슬픔을 삼킨 채 거리로 나섰고 경찰의 폭력에 짓밟혀 피 흘리고 있다. 오직 그이들이 이 시대가 용납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그런 이유로, 인간의 역사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실현함으로써 한 걸음씩 전진해왔음을 돌이켜볼 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 그이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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