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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국립극장에서 조금은 특이한 국악 공연을 즐겼다. 전석 초대의 행사였지만 출연자의 면면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공연이었다. 시내에서는 후덥지근했는데 남산 자락이라고 공기가 제법 삽상했다. 이번 공연은 탁월한 전통공연 기획자인 진옥섭 감독이 자신의 책 <노름마치>(문학동네)를 재출간하면서 마련한 무대였다. 노름마치란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 은어이다. 책에는 강호에 숨어 있던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발굴하기까지의 내력과 한껏 괄시받았던 그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흥과 멋이 두루 어울린 판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글뿐이랴. 입에 발통이라도 단 듯 말솜씨도 뛰어난 저자가 등장하자 분위기가 일순 후끈해졌다. “3분 이상 떠들면서 웃기지 못한다면 그건 죄악이여!” 특유의 재담을 펼치자 관객들도 여러 장단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김운태와 풍물패들이 길을 뚫었다. 갠지갯지 갠지갯지. 상모를 돌리고 꽹과리, 소고를 치며 무대에 오르자 공연장이 단박에 달아올랐다. 박경랑의 교방춤이 이어졌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내 안에 일렁이는 흥을 처리하고 있는데 한 가지 사실이 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 공연을 꿰뚫으며 주도하는 하나의 색깔이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그 색깔은 공연 시작을 알리는 김운태의 상모에서부터 드러났다. 그리고 박경랑이 교방춤을 출 때 치마 밑으로 슬짝살짝 드러나는 버선의 색깔. 


밀양북춤의 하용부가 등장했다. 그의 복장은 온통 이 색깔이었다. 머리에도 어깨에도 같은 색의 띠를 둘렀다. 북의 두드림 판도 같은 색깔이었다. 그는 무대가 비좁다는 듯 버선발로 이곳저곳을 휘잡으며 뛰어다녔다. 어느 순간 관객석 아주 가까이로 달려와 뚝 정지했다. 한껏 달아올라 손뼉을 더욱 힘껏 치는 사람들을 향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왁자하게 웃는 관객을 향해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그가 씩 웃었다. 그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빨의 색깔. 그 굵은 땀방울도 또한 같은 색깔. 


눈치챘겠지만 그 색깔은 하얀색이었다. 하얀색으로 시작해서 하얀색으로 이어지는 무대였다. 다음 순서는 이정희의 도살풀이춤이었다. 내 키의 두 배나 됨직한 흰 수건을 걸치고 소복 차림으로 그는 등장했다. 그가 공연하는 내내 처연한 혼불이 무대의 이곳저곳을 옮아다니는 듯했다. 


이정희가 도살풀이춤을 출 때 반주를 담당한 이는 통영에서 올라온 인간문화재 정영만의 구음 시나위였다. 징, 아쟁, 장구, 북, 해금, 대금. 무대 한쪽에 자리잡은 그이들은 한결같이 흰 한복이었다. 흰 버선을 신고 흰 띠를 머리에 둘렀다. 이들을 지휘하면서 서서 구음을 읊는 명인의 목소리에도 굳이 색깔을 부여한다면 흰색이 아닐까.


다음은 소리꾼 장사익의 무대였다. 그는 흰 모시한복에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고무신에 담긴 양말은 검은 색을 덮고도 남을 만큼 흰색이었다. 검은 신발 때문에 외려 더욱 하얗게 빛났다. 그가 부른 노래는 ‘찔레꽃’이었다. 흰옷으로 몸을 두르고 접신한 듯 얼굴을 약간 치켜들며, 흰자위를 살짝 보이며, 그 어떤 너머를 보는 눈빛에서 터져나오는 첫 소절.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장사익은 화끈한 무대와 휘황한 조명 아래에서 땀이 흐르자 손수건을 꺼냈다. 아주 곱게 핀 찔레꽃 한송이였다. 장사익의 노래가 나오자 눈가로 손을 가져가는 이가 여럿이었다. 아마도 눈물을 찍어낼 터. 눈물은 맑기도 짜기도 하지만 또한 희고도 하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운태가 다시 등장했다. 채상소고춤을 추는 순서였다. 중력을 이기면서 공중에서 타고 노는 자반뒤집기는 탄복을 금할 수 없는 기술이다. 잠깐 진옥섭이 물병을 가지고 나왔다. 다정한 두 동무 같았다. 숨을 고르는 김운태 곁에서 물을 마시면서 슬쩍 바닥에 한 모금을 흘렸다. 김운태가 그 물을 밟았다.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저항을 갖기 위해 맑은 물을 하얀 버선에 적시는 것이었다. 


내 좋아하는 국악으로 귀를 채우고 눈이 호강을 한 날. 오늘을 뭐라고 할까. 삼백 예순 다섯 날 중에도 날들의 노름마치가 있다면 단연 오늘 같은 날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피를 팔 듯 표를 판다고 한 저자였는데 부디 <노름마치>에 독자들의 손때가 많이 타기를! 공연장을 빠져나오면서 출판업자로서 빌어주었다.


국립극장 아래 장충동 할머니 족발집에서 뒤풀이한다는 전갈이 있었지만 낄 자리는 아니었다. 합석한다 해도 족발에 하얀 버선발이 겹치면서 뜯기도 송구스러울 것 같았다. 친구와 빈대떡 집으로 갔다. 무대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는 못했지만 나도 내 하루의 공연을 무사히 마친 야심한 시간. 그를 기념하듯 주전자를 기울이자 흰 막걸리가 콸콸콸 쏟아져 나왔다.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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