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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저수지를 배경으로 석양이 아름다운 서천군 벽오리 마을 입구에는 농산물 무인판매대가 있습니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검은 비닐봉지 등으로 정성껏 포장한 풋고추, 오이, 마늘, 양파, 계란 등을 매일 아침마다 진열하고 돌아섭니다. 누가 왔다 갔는지는 모르지만 물건과 돈은 대체로 일치하는 편이고 쪽지 메모들이 간혹 덤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작은 스티커에 주인이 써 놓은 손글씨가 가격입니다. 낮 동안은 새나 다람쥐만이 지나가다 가끔 쳐다볼 뿐입니다. 다만 돈 통만은 두꺼운 자물쇠로 꼭꼭 채워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신난 젊은 이장의 등쌀에 못 이겨 “팔리기야 하겠어. 재미로 좀 하다 말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재미로 좀 하다 보니’ 하루 매출이 평균 3만~4만원까지 늘게 되고 재수 좋은 주말에는 10만원 이상이 팔리기도 했습니다. 무인판매대에서 신뢰, 믿음이라는 가치를 읽고 확대 해석해 준 능동적 소비자와 내 밭에서 나오는 작물을 좋아해 줄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마을의 예견이 만나는 지점이 정확히 표현된 매출액입니다. 이어갈 만한 수준은 됐고, 마을이나 소비자나 모두 ‘좀 더 잘해 봅시다’ 하는 신호라고 생각했습니다. 유통 개혁을 넘어 유통 혁명이라는 농담도 있었지만 거기서부터는 유통을 잘 몰라서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의 잡담일 뿐입니다.

포스코 '무인가게' 편 CF, (경향 DB)


어느 정도의 손실은 감수할 수 있겠다는 마을 이장의 ‘통밥’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아주머니들의 용기로 일이 재미있게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올봄에는 원두막 모양의 제법 그럴듯한 매대도 마련했고, 마을 아주머니들은 그 앞에서 전지가위를 들고 테이프 커팅을 하며 활짝 웃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농산물 무인판매대의 최고가 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들기름이 없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소주병 하나에 1만원 정도 가격이지만, 한 병이 하루 매출의 30%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들기름 도난 사건은 신뢰와 믿음, 유통 개혁과 혁명, 이장의 ‘통밥’과 주민들의 용기에 커다란 균열을 내었고 재미를 잃어버린 아주머니들은 잠정 폐쇄를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남몰래 들기름을 가져가는 잽싼 눈과 손. 누가 들기름을 훔쳐갔는가? 궁금하지만, 너무 자세히 물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한 마을에 배정된 100개의 비료를 나누는 것과 비슷한 일이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한테 배정된 만큼의 비료를 가져가면 되는 것인데, 가장 늦게 가져가는 나로서는 해마다 정해진 양에 꼭 두 포대 모자라는 숫자를 가져가게 됩니다. 마지막에 없어진 비료 두 개는 누가 가져갔는가? 너무 자세히 캘 수는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CCTV라는 제도와 더 빠른 속도를 내는 방식으로 편입해 질문을 간단히 뛰어넘을 수도 있겠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묻지 않고, 남들처럼 하거나, 남들보다 빨리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빠른 속도로 살아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거나 우주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중간은 가는 것이거나 내 앞에 놓인 밥그릇 챙기는 것 정도라면 이것 또한 민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자세히 캘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나도 어디선가는 중간은 가기 위해서, 또는 내 앞에 놓인 밥그릇을 챙긴다는 마음으로, 누구의 피해가 될지 알면서도 들기름을 벌써 여러 병 가져갔거나 맨 뒷사람에게 비료 두 개의 손해를 입힌 경험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이미 지금의 속도로는 함께 사는 아주머니들의 작은 매대 하나 지켜 주지 못하고, 마을의 비료 하나 제대로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삶의 속도와 시공간까지도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세력들이 있어서 그들이 제시하는 평균에 맞추기 위해 오직 ‘더욱 힘차게’ 달려가는 일만 해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태 해 온 일이 그런 쳇바퀴 돌며 서로의 것이나 갉아먹어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매일매일 쳐다보는 인간과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FTA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이야기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들기름을 훔친 것이 결국 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포스코'무인가게' 편 CF, (경향DB)


무인판매대는 며칠 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특별히 대책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없어지는 들기름에 대해 까치밥이나 콩 세 알 심는 이치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다간 사람이 신선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웃 마을 친구로서 민망하게도 신뢰와 믿음을 이야기하거나 감히 개혁과 혁명을 얘기할 수는 없고, 그저 처음 시작한 아주머니들의 용기와 재미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싶을 뿐입니다. 잘되기가 힘들고 잘돼 봤자, 장강에 떨어지는 몇 번째 물방울이나 장성에 쌓인 몇 번째 돌덩이 정도 되겠지만, 삶은 ‘이겼냐 졌냐’ 또는 ‘얼만큼 이겼냐’ 따위의 치사한 것들을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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