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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일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정양모 신부의 <로마서 풀이>란 책을 작년에 펴낸 적이 있다. 정 신부는 “팔리지도 않을 책을 내줘 고맙다”는 말씀을 거듭하셨다. 


정 신부는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예루살렘 도미니코회 성서연구소에서 연구했으며, 광주 가톨릭대와 서강대, 성공회대에서 교수를 역임한 굵직한 성서학자였지만, 급진적 견해 때문에 한국 교회 안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아마도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을 너무도 사랑하고 사모한 나머지 고대인의 어법으로 최고의 존칭을 붙여드린 것”이라는 발언 때문일 것이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와 성령을 모두 하느님으로 여기는 가톨릭교리와 어긋나기 때문에, 어느 성당에서는 그분의 성서강의를 주교에게 밀고한 이가 있어 그만 강의 자체가 중단된 적도 있다. 정 신부는 어쩌면,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드러낸 ‘탁월한 우리들의 형제’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사랑하던 하느님이 사랑하는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을 사랑하며 그분 뒤를 따르는 사람들, 그분의 운명적인 십자가 죽음마저 나눠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 간 대화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정양모 신부 (경향DB)


유·불·선을 섭렵한 다석 유영모처럼 전방위로 소통하는 신앙을 지니고 싶어한 분이 정 신부다. 납득할 수 있는 신앙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었던 사제다.


그런 점에서 정 신부의 글은 모두 예수가 연정(戀情)을 품었음직한 이들에게 보내는 연서(戀書)다. 자신이 깨달은 그 사랑을 나눠 갖자는 통문(通文)이다. 최근에 나 역시 산문집 한 권을 내면서, 먼저 책 제목 때문에 고심을 거듭했다. 처음엔 ‘날아라 사슴, 눈부신 가벼움’이라 붙였다. 마종기의 시에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 죽인다는 사나운 세상의 공식을 넘어서” “날아다니는 사슴의 눈물 고인 길 따라” 가라는 말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오십대에 들어 처음 내는 이 책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결국 세상과 사람들을 통해 영원한 그 무엇, ‘그분’이라 불러도 좋고 ‘그대’라 불러도 좋고 ‘너’라고 불러도 좋을 분을 찾아나서는 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길 끝에서 그분을 만나고자 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문집 제목을 ‘너에게 가고 싶다’라고 지었다. 마침 눈 밝은 출판사가 있어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 첫 번째 산문집이 <연민>이었으니, ‘연민으로 너에게 가고 싶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책을 내고도 두루 알릴 길이 없었다.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보냈지만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간서적에 묻혀버린 것 같다. 페이스북 등에 올려 보았으나, 결국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그분을 사모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 책을 접할 것이다. 이미 ‘너에게 가고 싶다’고 써서 연서를 우체통에 넣었으나, 수신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런 편지조차 쓸 수 없어 애달파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글이란 마음 여린 이들의 대필(代筆)인지도 모른다. 내가 삶의 갈피에서, 그 어느 구비에서 만난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교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인터넷 대안언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기사가 교회에 영약(靈藥)이 되길 바라지만, 어느 주교는 “뭐, 그런 언론이 다 있어” 하며 언론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교회개혁의 목소리가 불편한 사람들은 ‘반교회 언론’ 운운하며 무시하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그들도 우리 기사를 몰래 탐닉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온다. 정양모 신부처럼 공적으로 취급받지 못하더라도, 비공식적으로는 그들과 소통하고 싶다. 교회와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나의 사랑, 우리들의 갈증을 나누고 싶다. 이처럼 나 역시 책을 통해서도 너에게, 그대에게, 그분에게 가고 싶다. 


서거정은 ‘독좌(獨坐)’라는 한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홀로 앉아 오는 손님도 없이/ 빈 뜰엔 빗기운만 어둑하구나/ 물고기 흔드는지 연잎이 움직이고/ 까치가 밟았는가 나뭇가지 흔들리네/ 거문고 젖었어도 줄은 울리고/ 화로는 싸늘한데 불씨는 남아 있네/ 진흙길이 출입을 가로막으니/ 하루 종일 문을 닫아걸고 있으리.” 사방이 가로막힌 듯하여 홀로 적적한 상황, 습기를 잔뜩 머금어 소리가 날 것 같지 않은 거문고도 퉁겨보니 소리가 나고, 손에 대어보니 싸늘한 화로인데도 헤집어 보니 불씨가 살아있다는 말에 안심이 된다.


대단한 사람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시인 백석은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 했다. 그 마음이 가랑비처럼 젖어들어 서로 행복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이따금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에게 가고 싶은 것이다.



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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