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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석|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통합진보당 내분 사태의 불똥이 이곳 남도땅 강진까지 튀었습니다. 지난 4·11 총선 국회의원 비례대표 경선을 관리했던 간부들이 부정선거 책임자로 몰리고 있습니다. 강진군 통합진보당 당원은 몸을 쓰는 노동자, 농민이 많습니다. 이분들이 생활을 하시면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당 사무실이기에 같은 컴퓨터로 투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농민들은 집에 컴퓨터가 있어도 나름 복잡한 인터넷 투표를 직접 하기가 약간 ‘거시기’한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같이 나와 투표하셨습니다. 당 실무를 하는 일꾼들은 투표를 할 때마다 곤혹스럽습니다. 단독 후보인 경우에도 기어이 찬반을 물어야 하는 당 규정상 50% 투표 참여는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 총선 후보를 뽑는데도 형님, 동생 부르며 “막걸리 살 테니 나오라”고 소리치면서 투표했습니다.

같은 컴퓨터에서 무더기 투표 행위가 진행됐다는 것은 적어도 이곳 강진 상황에서는 실제로 큰 문제가 아닙니다. “큰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더 큰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저 같은 사람을 부정 불감증 환자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강진군 농민회는 간부가 어느 정당이든 당원이 되거나 공직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선 일정한 승인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농민회 간부인 저는 후원당원이었습니다. 당비는 내지만 당원은 아닌, 당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비례대표 후보 선거를 할 권한이 없습니다.

농민회 간부 일을 놓고 당에 입당하기 위해 원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글쎄 제가 당원이라고 뜨는 겁니다. 조금 이상했지만 비례대표 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보당 혁신비대위 회의 ㅣ 출처:경향DB

합당 전 후원당원은 합당 후 어떤 신분인지 누구 하나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당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든지, 아니면 내용을 제가 몰랐든지 둘 중에 하나겠지요. 투표권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쳤을 수 있지만 투표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각자 상황은 조금 다르겠지만, 저 같은 사람들이 한통속으로 ‘유령 당원’이 되었습니다. 당원이 아닌 사람이 부정하게 투표했고, 실제 선거인명부상 투표권자보다 투표한 사람 수가 많은 일이 벌어졌다고 발표되었습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진보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역사상 남한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제3당이 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이 많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진보정당을 조명한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쓰나미는 순식간에 왔고, 괴로운 긴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일이 벌어진 후 제일 서글픈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함부로 정치적 감투를 씌운다는 겁니다. 출세주의자, 패권주의자, 조직이기주의자 등 어려운 말이 판을 칩니다.

“오야, 자네는 무슨 파인가”라 묻는 상용직 노동자 당원의 질문을 받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저는 쪽파를 심었습니다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난감했습니다.

농촌에선 조생종 양파값이 폭락하고 대파를 갈아엎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세상은 온통 ‘파’잔치뿐입니다. 인근 지역 친구는 무슨 파일까? 의심하면서 서로들 말을 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친한 선후배들이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해도 가슴이 뜨끔뜨끔하고 의견 하나 내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단절을 믿음과 의리로 회복하는 일이 비대위를 만들어 당을 혁신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연결해야 할 정치가 사람이 사람을 치는 정치가 되었습니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서울에서 한참 먼 강진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강진에 ‘늦봄 문익환학교’가 있습니다. 대안학교입니다. 이 학교가 갑자기 불순세력이 불순분자를 양성하는 주사파 학교로 지명되었습니다. 통일기행, 강정마을 평화기행이 색깔로 덧칠되고 연좌제를 적용할 기세로 부모의 과거를 공개하고 선생님을 친북으로 몰아갑니다.

이 나라를 뒤흔들 만큼 힘있는 일간지가 작은 대안학교까지 들여다보자고 나선 이유는 이 나라 전체가 썩었다고 경고하고 싶었거나 이 학교의 명예이사인 민주통합당 문성근 최고위원을 겨냥해 사상검증을 하겠다는 것,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이제 종점이 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마지막 결론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부정선거에서 조직이기주의로, 주사파에서 야권연대로, 결국 정권 재창출을 위한 보수세력의 결집으로 마무리되는 한 편의 잘 짜여진 드라마가 마지막 회를 앞두고 시청률을 조율하고 있습니다.

통합진보당이 어떻게 될 것인지 시골 촌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압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누구는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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