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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 스님


가는 봄을 붙잡고자 푸른 솔 향이 좋은 숲길을 걷고 있다. 언제나 걸어도 좋은 길. 그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세상 어디에 있든, 생의 어느 시간에 있든 여유와 평화로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정리할 일이 생기면 걷는 게 습관이 되었다. 소중했던 출발의 시간을 떠올리며 마무리를 신선하고 긴장되게 한다. 사실 ‘지금’이란 늘 마무리이면서 출발점인데, 무기(無記)의 시간으로 보내고 있을 때가 많다. 천천히 걸으면서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을 살펴보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다.



 여기저기 떠돌다가도 가야산 숲길을 생각하면 행복하다. 싱그러운 초심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수행을 향한 도반들의 맑은 눈빛이 있다. 그때는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지금에야 이렇게 그리워할 줄을. 


그 길을 걸으면서 “부초심지인(夫初心之人)은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하고 친근현선(親近賢善)하야 수오계십계등(受五戒十戒等)하야…”하며 ‘초심’을 외우고 있노라면 새들이 시끄럽다고 얼마나 하소연을 해댔는지. 이 대목, 시작의 첫 구절부터 도반들 사이에서는 “초발심자도 부처님의 제자인데 어떻게 나쁜 친구를 멀리하고 좋은 친구만을 사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부터 시비를 했으니 어찌 하루하루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겠는가. 당연히 선배 스님들로부터 지적받아 참회의 절을 참 많이도 했다. 아마 졸업 때까지 4년을 헤아리면 수십만 배는 족히 될 것이다. 그때는 그 구절을 이렇게 이해하고 지나갔다. ‘수행에 도움 되는 벗과 도움 되지 않는 벗을 초심 때는 잘 가려야 한다’고 말이다. 


어른 스님들께서는 승려생활 한참 하다보면 다시 ‘초심’을 읽게 된다고 하셨으나, 우린 언제 이 과목을 끝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아직 승가의 단체생활이 몸에 배지 않기도 하였거니와 설익은 ‘도(道)’ 타령으로 선배들의 눈 푸른 납자 풍모를 흉내 내려는 마음이 앞선 탓이었다. 


승가도 하나의 사회이고 보면 이러저러한 인연에 따른 삶이 있다.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그 눈빛이 성성한 도반들도 있지만 오늘 나의 눈빛과 몸짓은 비 맞은 풀옷과 같다. 그래도 가끔씩 도반들을 만나면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보는데, 그 참회했던 절 세례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가 보다.


얼마 전 처사님 몇 분이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때 가슴속에서 찬 기운이 도는 것을 느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운인가. 흐릿했던 눈빛은 다시 긴장감이 돌았다. 아! 선지식이 따로 없구나. 가르쳐준다는 생각 없이 다시 배우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처음 발심한 사람은 반드시 나쁜 벗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 하여….” 조금씩 공부에 참여하는 이들이 늘어나 법당이 채워졌다.


다시 흐릿한 눈을 뜨고 시비를 시작한다. “내 육근의 경계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려놓은 세계입니다. 그러면 선우나 악우도 내가 그려 놓은 벗입니다. 따라서 어떤 벗도 선하거나 악한 이는 없습니다. 여기서의 분별은 ‘나에게 맞다, 안 맞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에게 악우가 생겼다면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 장로 수보리존자처럼 다툼 없는 삼매(無諍三昧)를 얻게 해줄 선지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즉 나에게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해줄 벗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선지지범개차(善知持犯開遮)’를 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수행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언제쯤이나 저 가야산 푸른 숲을 닮아 ‘지킬 때, 범할 때 그리고 열고 닫을 때’를 알게 될 것인가. 시비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는 지혜로운 삶의 모습. 그래도 이렇게 다시 책장을 넘길 수 있는 것은 그 시절 작은 인연의 씨앗이 발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조금 타인의 삶이 이해되지 않는 게 없는 듯하다. 삶이 무뎌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행복이란 생각의 시침이 앞보다 과거를 추억하는 데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그렇게 불편했던 도반까지도 궁금하고 그리운 때가 되었다.


“옥토끼(달)가 뜨고 지니 사람이 늙고 /금까마귀(해) 오르내리니 세월만 가네. /명예와 재물은 아침 이슬 같고/ 괴롭고 영화로운 일 저녁하늘 연기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는데, “도가 사람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멀리한다”는 <초발심자경문>의 마지막 간절한 말씀이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그 시절 그 가야산 숲길은 아니지만, 봄 햇살 고운 날에 솔숲을 걸으며 읊조려 본다. “부초심지인은 수원리악우하고 친근현선하야….” 


초심은 묵은 마음을 잘 정리하는 데 있다. 이렇게 끝나지 않는 길을 하염없이 걸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도반들도 함께 걸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아쉬운 대로 새들이 시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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