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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고 물기 꼭꼭 닦은 뒤 올라가는 곳이 있다. 몸무게를 좀 줄이고 싶은 건 내 오래된 희망 중의 하나이다. 어제 점심시간에는 인왕산 허리의 산책로를 걸었다. 그러니 눈금도 정상을 참작해주지 않을까. 그런 얄팍한 기대감으로 거실 한편의 체중계, 간이저울로 올라가는 것이다.



(경향신문DB)



그러나 나의 기대가 문제였지 바늘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저울은 야윈 손으로 내심 지목한 숫자의 바깥을 태연히 가리켰다. 쥐꼬리만큼 운동하고 맛난 것 찾아 포식한 결과는 냉정했다. 하지만 내 머리는 좀전의 실망을 금방 잊었나 보다. 버릇대로 밥을 잔뜩 먹은 것이다. 거북한 배를 안고 문을 나섰다.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알아들었다고 외눈을 껌뻑거렸다. 


어쩌다 큰 빌딩에 갈 때 엘리베이터 때문에 난감할 때가 있다. 그냥 계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내 몸피와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서로 덜렁 몸을 실었다가 삐익, 소리를 들었던 적이 여러 번이다. 민망해진 나를 배제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슬며시 웃음이 번졌을 것이다. 소심한 나는 인생에서 무슨 반칙이라도 저지른 양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었다. 그럴 때 엘리베이터는 승객의 무게를 단체로 재는 저울이었다.


 


나 혼자를 태우고 엘리베이터는 사뿐히 1층에 도착한다. 나는 아무런 가속도도 느끼지 않은 채 땅을 밟는다. 그리고 중력을 이기며 버스정류장으로 부지런히 발을 옮긴다. 정류장에는 횡단보도가 있고 바로 그 길목에는 택시들이 대기하고 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중년의 신사가 택시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뒷문을 열고 몸을 집어넣었을 때 차체가 꿀렁, 내려앉았다. 아마 진동을 흡수하는 차체의 스프링이 무게를 감당하면서 진저리를 한번 쳐보는 것일 테다. 뒤이어 젊은 아가씨가 다음 택시를 탔다. 이번에는 차체가 아주 조금 귀엽게 흔들렸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새롭게 알았다. 자동차 또한 손님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란 것을.


오늘은 좀 늦은 바람에 택시를 타기로 했다.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같은 정류장에 있어도 사람들의 시선은 각각 다르다. 혹 그중 누군가에게 내 무게가 들킬 것 같아 아주 조심스러워졌다. 뒷자리에 사뿐히 앉는다고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대한 얌전하게 두 발을 저울에 올리는 동시에 문을 닫는다.


그 순간부터 이젠 또 다른 저울이 작동된다. 일본의 여행가인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기행>(청어람미디어 발행)에 이런 대목이 있다. “티베트에는 신이 하늘에서 천칭으로 이 세상을 저울질한다는 미신이 있다. 천칭의 양쪽 끝 받침접시에는 행운과 불운이 올려져 있는데, 불운이 무거워지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은 행운의 받침접시에 돌을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원리를 자세히 관찰한 후 터득한 하나의 명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렇게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이 택시 안도 하나의 작은 세상이고 차체는 잘잘못을 재는 하나의 천칭 저울이다. 앞에서는 운전사가 핸들을 잡은 채 전방을 보고 있다. 뒤에서는 한 뚱뚱한 승객이 신문을 읽고 있다. 그러면서 서로 저울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글쎄 이 좁은 택시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운전사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얼마나 저지를까. 촘촘한 교통법규와 사방에서 번뜩이는 교통경찰의 매서운 눈초리 속에서 큰 사고는 아주 드문 일이고 그저 과속이거나 신호, 차선, 주정차 위반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주로 뒷좌석에 앉았다가 세상으로 바삐 뛰쳐나가는 자들. 지금 뒷좌석에 펼쳐진 신문의 앞뒷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다면 정말 큰 잘못일 테다. 그러니 내친김에 좀 더 고약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만약 굳이 선악(善惡)의 편을 가른다면 어떻게 될까? 운전석이 선의 편이고 뒷좌석은 그 반대편이 아닐까? 실제로 운전사가 전방을 주시하면서 조용히 일하는 동안 뒷좌석에서는 끊임없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건 내면의 어떤 불안을 감추려는 행동원리가 아닐까? 


이윽고 사무실이 자리한 인왕산 아래의 옥인파출소 앞에 도착했다. 출입문 옆 게시판에 주요 지명수배자들의 전단이 보였다. 바로 이웃한 담벼락에도 큰 얼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큰일을 하겠다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었다.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거니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아마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뽑혀 그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지만 들고나는 자리인 내 궁둥이 아래는 더 깜깜하다. 저울에서 내리면서 맡겨두었던 무게를 고스란히 돌려받자 나는 또 무거워졌다. 그런 나를 길거리에 물끄러미 세워놓고 택시는 떠나갔다. 제법 근수가 나가는 나를 벗어놓은 택시는 한결 홀가분해졌나. 미끈한 차의 엉덩이가 땅에서부터 적어도 내 발등만큼 더 높아진 것 같았다. 지금껏 내 몸에 쌓인 잘못의 무게와 그 높이가 전혀 무관치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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