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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삐약삐약” 갓 태어난 병아리 1000수를 들여온 날은 비 온 뒤 기온이 뚝 떨어진 날이었습니다. 부화장 사장님은 “보온 잘해야 해요”했지만, 과한 보온보다는 추위를 견디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가 죽는 것은 추워서가 아니라 추위를 이기기 위한 과정에서 한 곳에 몰려 압사하는 이유가 대부분입니다. 몰려서 겹치지 않도록 잠자리에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어 주고 볏짚이나 왕겨 정도로만 보완하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오히려 추위를 견디는 과정에서 잔털이 발달하고 돌아오는 겨울에도 튼튼히 버틸 체질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어미 품만큼이야 하겠습니까만은 이 정도면 길러야 하는 사람과 커야 하는 병아리의 적절한 타협점입니다.


 올겨울은 이 병아리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아직은 올망졸망 모여 겁먹은 표정으로 주인 눈치를 보고 있지만 금방 천방지축 날듯이 뛰어다닐 겁니다. 점점 자라 벼슬이 나올 때쯤 되면 생긴 것도 하는 짓도 꼭 말 안 듣게 생긴 중학생이랑 어쩜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변성기가 지나고 “꼬끼오” 발음이 점점 그럴듯해지면 주인이 있든 없든 신경도 안 쓰고 여기저기서 짝짓기를 하게 되는데,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하는 유리왕의 심사를 굉장히 사실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당장 각시에게 달려가고 싶습니다. 넉 달이 조금 더 지나면 예쁘고 신선한 초란이 나오고 이때 딸들은 날마다 농장으로 출근합니다. 짝짓기하는 닭들이 농장주인 쳐다보듯, 일하고 있는 아빠는 안중에도 없고 날계란만 물리도록 쪽쪽 빨아 먹습니다. 알려주지 않아도 아이들의 입맛은 좋고 맛있는 것을 찾아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매서운 바람과 함께 한파도 찾아올 것이고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장화를 신고 닭장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언 물을 녹이느라 고생하는 날도 더러 있겠지요. 그래도 큰 일이 없으면 알을 낳기 시작하는 내년 초봄에는 통장에 돈도 제법 들락날락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희망을 품는 가을입니다.


구호 외치는 양계농민들 (출처: 경향DB)


문제는, 올봄에도 그랬다는 겁니다. 봄일 도우러 온 친구 녀석은 논농사 1만평을 짓는다는 말에 “땅부자네!”하는 실언으로 “뭣도 모르는 놈!”하는 핀잔을 들었고, 못자리 때 뿌리는 볍씨 한 톨에서 대략 100개 정도의 이삭이 나온다고 하니 “백배 장사면 그것뿐이 할 것 없겠다”며 히죽대다가 급기야 뒤통수를 얻어맞기까지 했습니다만, 사실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긴 봄 가뭄에도 그럭저럭 들로 시집보낸 모들은 싹수가 좋았고 뙤약볕을 이기며 잘 자라주었습니다. 장마에, 태풍에 맘 졸이기도 했지만, 항상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녘에서는 태풍 피해로 한 해 농사를 다 버린 곳도 꽤 된다지만 내 나락은 조금 더 실할 거라는 기대를 접지 않았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서 내 농사만 좋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통계청 발표만 보더라도 올해 쌀 생산량은 사상 최저치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현장에서 느끼는 감으로는 훨씬 더한 흉년입니다. 가을 들판에서 늘 하던 “나락 많이 나왔는가?”하는 인사가 민망해집니다.


풍년 농사였어도 별로 다르진 않았을 겁니다. 땅 임차료가 수확의 거의 반절입니다.(소작쟁의라도 해야 하나) 농자재, 농기계 값은 해마다 물가 상승률을 선도하고 있지만 나락 값은 10년 전 그대로입니다. 20년 전하고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짜장면 값은 10년 전 3000원, 20년 전 1300원. 미안하다 짜장면.) 1990년대 말 80% 정도였던 도시가구소득대비 농가소득은 2011년 59%까지 떨어졌습니다. 하위 수준일수록 그 격차는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대부분이 중소 가족농임을 감안하면 도시가구소득대비 59%라는 숫자는 정확히 나의 경제입니다.


결혼하고 12년 동안 늘 함께해 왔던 냉장고, 세탁기, TV에게는 13년을 향해 달리자고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이제 보내줄 때가 되었다는 고물 트럭에게도 동요하지 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말은 안 해도 가을에 기백만원 정도는 통장에 넣어 줄 바람을 가지고 있을 각시에게는 직접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이렇게 지면으로 전합니다. “미안하다. 없다.”


농민의 위험은 곧 밥상의 위험입니다. 22%까지 떨어진 식량자급률, 80%대까지 떨어진 쌀 자급률, 한우값 폭락, 돼지값 폭락의 소식 뒤에는 비소 함량 논란이 있는 미국 쌀, 온 국민의 촛불을 넘어 온 수입 소고기, 비싼 석유 써가며 왜 여기까지 왔어야 했나 싶은 원산지 불명의 농산물들이 악마의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모자라면 항상 사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세계 곡물 소비량은 생산량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유통과 공급과 가격의 결정권은 농민과 착한 국민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의 손에 있습니다.


59%라는 농민의 경제와 22%라는 당신의 밥상을 극복하지 않고는 박 ○○%, 문 ○○%, 안 ○○% 하는 숫자가 주는 희망도 한낱 신기루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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