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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교문의 쇠창살을 부여잡고 자꾸 내 눈을 맞추려 애쓰던 엄마를 외면하고 돌아서 낯선 강의실에 몸을 부렸다. 그리고 12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 혹은 관성으로 묵묵히 시험을 보았다. 점심으로 싸간 햄버거는 오래오래 씹다가 아무것도 소화시킬 수 없을 듯한 체증에 그대로 뱉었다. 긴장만큼 비린 육즙과 불안처럼 흥건한 노린내가 마지막 시간까지 코끝과 입안에서 맴돌았다. 아무도 모르게 내내 헛구역을 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모질게 추웠던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이론’에 따르면 무작위의 기억은 그것을 접한 19분 후에 41.8%, 63분 후에 55.8%, 31일째 78.9% 사라진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19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58.2%, 63분 후의 44.2%, 한 달이 지나도 남아 있는 21.1%는 무엇일까? 25년이 넘도록 잊히지 않는 기억이란 어떤 의미 혹은 상처의 흔적일까?

 

수능 앞둔 학부모의 간절한 기도 (경향DB)

닷새가 지나면 또다시 그날이다. 25년이 흘러도 그날 치른 시험에서 유독 풀리지 않았던 문제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25년이 지나도 닫힌 교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들과 소화불량에 걸린 아이들은 판박이로 재현된다. 남의 일이 아니다. 당장 내년이면 나도 차가운 쇠창살을 홈켜잡은 채 홀로 돌아서는 아이의 뒤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봐야 할 것이다.

공부가 있으니 시험이 있다. 공부의 시작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를 깨닫는 것이니, 여태껏 배운 것을 점검하고 실력을 평가하는 절차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65만명이 한날한시에 머리를 싸매고 오직 하나뿐인 정답을 찾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괴이하다. 게다가 괴로운 것은, 그처럼 노골적으로 수치화된 점수가 인생의 출발점에 선 아이들을 오래도록 추운 겨울날에 묶어두고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10월 초에는 수학능력평가를 한 달 앞두고 마지막 모의고사가 치러졌다. 전통적(?)으로, 10월 모의고사는 쉽게 출제된다는 속설이 있다. 재수생들이 치지 않는 시험이라 재학생들의 등급이 나아지니 ‘자살방지용 모의고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에 조삼모사라 해도 당장 성적표에 찍혀 나오는 등급이 조금이라도 높으면 그 뭉근한 위로에 기대어 남은 시간을 버텨낼 수 있다고 한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시대의 유머에는 성적의 부침에 죽고 사는, 죽어버리고만 싶은 수험생들의 마음이 배어난다.

나는 또한 기억한다. 시험을 전후로 어김없이 들려오던 비극의 소문. ‘성적을 비관하여’ 짧은 생애를 스스로 마감했다는, 얼굴은 모르지만 내 친구들과 닮았음이 분명한 어느 아이의 이야기. 그마저 25년을 거슬러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음에 공포를 느낀다. 그들이 ‘패배자’이고 우리가 ‘승리자’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일 뿐이다.

25년 전에는 어른들을 비난하고 세상을 원망했지만, 그럴 권리가 충분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화시킬 수 없는 세상에 무력감과 열패감을 느낀다.

기실 대학에 가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대학 정원이 수험생의 수를 넘어선 마당에 누구나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 하지만 경쟁주의, 서열주의, 학벌주의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어간다. 누구나 갈 수 있기 때문에 아무나 갈 수 없는 대학에 대한 선호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기절 놀이를 한다. 한껏 숨을 참은 채로 목을 누르고 가슴을 압박해 일시적인 기절 상태에 빠진다. 뇌로 이어지는 혈액 순환을 가로막아 저산소증을 유발하고 뇌세포를 파괴시킬 수 있는 위험한 장난을 즐기며, 어른들의 눈을 피해 삶보다 더 쉬운 듯만 보이는 죽음을 엿본다.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띵하고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 찌릿하다. 그래도 소질이든 능력이든 흥미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달리는 무의미한 고통보다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 고통이 차라리 재미있다.

악순환의 쳇바퀴가 어디까지 굴러갈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대입시험은 온 나라를 들썩일 만큼 중요한 행사다. 그러나 아이들의 예상과 세상의 주장만큼 그 시험 하나가 앞으로 펼쳐질 삶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삶에는 세 가지가 없다. 비밀, 공짜, 그리고 정답. 시험의 정답은 있을지언정 삶의 정답은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닷새 후의 시험도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시험 중의 하나로 즐겁기까진 못해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것을 먼저 겪은 이들이 할 일은 찰떡과 초콜릿보다 쫀득쫀득한 격려와 달콤한 위로를 보내는 것뿐이다. 소설가 전경린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리자면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의 후원을 받는 작은 별같이 힘껏 반짝’이기를, 언젠가의 우리를 닮은 그들을 위해 가만히 소망한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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