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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 소설가



청맹과니 어린 날엔 몰랐다. 부모도 자식으로 인해, 선생도 학생 때문에 상처받을 수 있음을. 강의가 시작되자마자(혹은 시작되기도 전에) 졸다 못해 아예 잠드는 대학생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일희일비하거나 흥야항야하지 않기를 매양 다짐함에도 어쩔 수 없이 받은 생채기로 쓰라리다. 처음엔 젊은이들의 밤잠이 어찌 그리 부족한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의 가수면 상태는 아침 1교시든 오후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든 교양필수 특강이든 매한가지였다. 다음엔 자기반성으로 내 이야기가 그리도 시시하고 재미없나 고민하며 점검했다. 멀티미디어 세대는 눈부터 사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개 발에 편자인 프레젠테이션 자료까지 멋들어지게 만들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내용을 바꾸고 형식을 개비해도 애초에 잠잘 의지와 자세에 충만한 그들을 깨울 방도가 없었다. 화가 나기보다 속상했다. 본디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 무능자처하였으나 소통과 공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돌심보인 내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왜? 도대체 왜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와서 강의실 의자에 걸터앉자마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잠드는가? 아무런 학문적 호기심도 없다면 차라리 강의실 밖 세상 공부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나야 주제넘은 헛짓을 걷어치우면 그만이지만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젊은이들의 가수면 상태는 안타까움을 넘어 커다란 의문으로 다가왔다. 모르면 물어봐야 한다. 물어도 대답 없는 당사자들을 대신해 그들을 가까이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지인들을 붙잡고 물었다. 아래의 사례는 개인적 인맥으로 만난 이들에게 청해 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이다.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L선생은 교양필수 과목인 ‘채플’을 진행할 때 자괴감과 모멸감으로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애당초 ‘방송 설교’를 한다 생각하고 강의를 하노라 고백했다. 유명한 ‘파워 블로거’로 종종 대학 특강을 하는 친구 W도 연예인의 가십을 말할 때나 눈을 뜨고 있다가 조금만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세 눈감는 학생들 때문에 강의 청탁을 가리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이른바 ‘독일 박사’로 지칭되는 학문적 내공이 깊은 유학파들도 도무지 통(通)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고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있는 지경이란다.


이렇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강의실의 공기를 강사 K는 ‘소비자 이론’으로 설명했다. 요즘 학생들(아, ‘요즘’ 젊은이, ‘요즘’ 아이들이라는 표현은 정말 쓰기 싫지만!)은 철저히 소비자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구매하는 자세로 수업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필요 없는 상품은 간단히 외면한다. 그래서 강사 K는 직접 강의를 줄이고 학생들이 스스로 ‘영업사원’이 되도록 수업의 진행을 맡기는 방식을 택한다고 했다. 


(경향신문DB)


그런가 하면 사교육 1번지로 지칭되는 한강 이남의 어느 동네에서 20년 동안 인기 강사로 이름을 날렸던 후배 N은 대학의 관문에 이르기도 전에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빼앗겨버리는 아이들의 현실을 증언한다. 일주일에 적게는 대여섯 곳에서 많게는 열 군데가 넘는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을 N은 ‘좀비’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일요일에도 오전 내내 ‘과학 실험’ 과외를 받고 오후에 학원에 와서 책상 위에 널브러진 아이를 보면 도저히 일어나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그처럼 엄청난 돈과 시간과 (노력이라기보다) 에너지를 투여한 데 비해 결과물은 기대치에 크게 밑돌지만, 어쨌거나 결과가 좋아 대학 입시에 ‘성공’했다고 해도 아이들의 영혼은 바스러진 나비의 날개처럼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단 한번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 채 자라나 명문대 학생이 된 후 복수하듯 스스로의 삶을 방기하는 N의 제자 이야기는 까닭모를 선잠에 빠진 젊은이들을 볼 때와는 또 다르게 마음을 저리게 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맨 처음 일이 어쩌자고 자기 파괴여야 했을까. 그 복수는 무엇을 위해, 누구에게 하는 것일까.


모든 시대의 청춘은 고단하다. 나 또한 불안에 시달리며 차라리 혼곤한 잠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어쩌면 강의실 의자에 파묻혀 잠든 그들은 밤새 ‘알바’에 시달렸거나 불가부득한 불면의 밤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령을 잡을 수 없는 춘곤증의 이유가 그동안 길들어 온 서열주의와 경쟁주의의 피로감으로 인한 무기력이라면, 젊은이들에게 들씌운 수마(睡魔)는 고스란히 어른들의 책임이다. 봄(春)은 봄(見)이라 더 많이 보고 기어이 봐야만 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반짝이는 눈빛들에게 희망을 건다. 그런 한편으로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날에 맥을 놓고 까무룩 잠들어버린 푸른 봄들에게 자꾸 마음이 쓰인다. 그들을 깨울 방도는 없을까? 퇴마사가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한잠 푹 자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을까? 해답을 아는 분이 있다면 제발 좀 가르쳐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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