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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3년 전까지만 해도 보행이앙기를 끌고 쫀득쫀득해진 무논을 철퍽철퍽 걸어다니며 모를 심었습니다. 허벅지까지 꽉 끼는 물장화를 신고 하루 종일 1만여㎡의 논에 모를 심고 나면 온몸이 한여름 엿가락처럼 흐물흐물해지지만, 네 줄씩 착착 심어지면서 들판이 파랗게 채워지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할 만한 일이었습니다만, 힘들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몸의 상태에 따라서가 아니라 승용이앙기가 점점 눈에 많이 띄면서부터였습니다. 더구나 보행이앙기를 끌고 서너번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옆 논에서 승용이앙기로 논 한 자리를 다 심고 “어이! 이리 와서 술 한잔 먹고 하소” 하면, 이건 참, 술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부르는데’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일감의 정도와 아직은 끄떡없는 체력에 비추어 나에게는 꼭 맞는 기계였지만 아무도 취급하지 않아 호환성이 떨어지게 되고 ‘궁상 그만 떨라’는 압박에 시달려 3년 전 고물값 5만원을 받고 고물상에 넘기고 말았습니다.
(경향신문DB)
한두 해는 동네 형님 이앙기를 빌려 심었습니다. 하지만 “돈 받을 것 같으면 빌려주지도 않는다” “너, 기계 살 때까지는 그냥 쓰라”는 말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 것이고, 그 간극에서 나는 염치를 발견했습니다. 염치인지, 자괴감인지 모를 마음으로 다음해부터는 이앙기 영업을 하는 사람에게 모 심는 것을 통째로 맡겼습니다. 돈으로 해결하니 걱정은 덜했고 몸도 편했습니다.
모를 많이 심는다 해도 승용이앙기로 1년에 열흘 이상 모를 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승용이앙기는 아무리 썩어도 5만원에 넘길 수 있는 고물이 아닙니다. 가을 바심에 길어야 보름 정도 쓰는 콤바인도 수천만원, 봄에 논을 갈고 꾸미는 트랙터도 수천만원입니다만, 농사짓는 집마다 갖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일을 돕거나 급한 사람에게 빌려 주는 인정은 있지만 같이 장만하고 사용하는 데에는 손을 내젓습니다. 합자하면 ‘망하고’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들입니다. 내 편리대로 쓰는 만큼 수천만원짜리 농기계 때문에 부채가 악성이 되어 가는 과정도 혼자 견뎌야 하는 일입니다.
마을 궂은일을 함께하고, 초상에 상여를 함께 메고, 절기마다 회관에 모여 밥 나눠 먹는 마음으로 농기계를 함께 쓰는 일은 왜 가능하지 않은 걸까요?
경지면적과 농기계의 작업량을 고려해 우리 마을에 필요한 농기계의 숫자를 산출하는 것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을을 협동의 단위라고 전제했을 때 당장 우리 마을의 잉여 농기계만 처분해도 수억원의 고정자산 처분 이익이 생기게 됩니다. 새로운 성장의 이름이, 사라지지도 않는 ‘4대강 사업’일 수도 있겠고 사라져버린 ‘경제민주화’일 수도 있겠으나 협동과 연대의 관계를 통해 얻는 이득이야말로 새롭고도 무한한 성장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삶의 무대를 경쟁에서 협동으로 옮기는 결단 이상으로 기술 혁신을 위한 부단한 노력 또한 중요합니다. 가까운 몇몇 유정란 생산농가들은 100% 우리 곡물 사료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농업의 근간인 소규모 가족농이 연대해서 국산 곡물만으로 계란을 생산한다는 취지입니다만, 축산연구원 박사들이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 만든 배합사료의 결과를 넘어서지 못하고 낮은 산란율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착한 소비자들의 격려로 버티고 있지만 더 많은 소비자를 만나 하나의 흐름을 만드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을 통해 극복해 낸다면 축산업에도 일대 혁신이 오리라고 굳게 믿으며 서로 애쓰고 위로하고 있는 중입니다.
대한민국 과수농가에겐 지긋지긋한 캘리포니아산 오렌지이지만, ‘썬키스트’는 도매상들의 횡포에 맞선 캘리포니아의 소규모 농가들이 판매와 유통을 직접 조직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온 협동조합입니다. 유니폼에 상업광고를 찍지 않고 유니세프를 후원하는 ‘FC바르셀로나’ 역시 전 세계 20만 조합원이 회장 선출 권한을 갖는 ‘클럽 그 이상’의 협동조합 기업입니다. ‘썬키스트’와 ‘FC바르셀로나’를 보며 키우는 협동의 꿈도 나무랄데는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 마음에 확 와닿지 않던 차에 우연히 서울시 협동조합 상담센터에서 만든 포스터를 보았습니다. 다섯 마리의 기린이 초원에서 협동조합을 구상하는 내용입니다. ‘유기농 먹거리’와 ‘공동 육아’를 고민하는 기린의 말풍선 마지막에 “사자 망보기 협동조합은 어때?”라는 문구를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웃다가, 다시 보다가, 기린도 생각하고, 사자도 생각하다가 ‘사자 망보기 협동조합’에서 ‘협동과 연대’에 대한 ‘기린의 사즉생 결기’를 읽었다면 심각한 오독이겠습니다만, 내 삶을 스스로 기획하고 우리의 필요와 상상력을 함께 조직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룬다면 지금, 여전히 그냥 가고 있는 길의 끝이 어떨지 대충은 알고 계시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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