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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 소설가
내 고향은 동해에 잇닿은 변방의 작은 도시다. 황제의 야망보다는 제후의 평강을 택한 시조를 따라 천년 동안 삶터를 지킨 토박이 집안에서 수성(守城)의 미덕을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어린 나를 쏘삭인 것은 타지 출신들이 ‘텃세’라고 부르는 가득권의 안정감보다 ‘탈출’에 대한 의지였다. 한마디로 나는 답답하고 지루했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같은 반에 두어 명씩은 돌림자를 쓰는 방계 친족이 있었고, 성씨가 달라도 따지고 들면 사돈에 팔촌쯤 되는 친구가 수두룩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에 들썽거리던 시절, 아무리 정처 없이 헤매려도 아버지 친구, 엄마 친구, 동생의 친구와 이웃 아줌마 아저씨까지 거듭 부딪치는 좁디좁은 ‘시내’를 견디기 힘들었다. 항상 감시당하는 기분이었기에 한시바삐 벗어날 궁리뿐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익명의 숲, 너른 세상에서 내 멋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이제는 그렇게 떠나온 고향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타지를 떠돌며 산 세월이 더 길다. 낯설고 두려웠던 대도시가 어느덧 생활공간으로 익숙해졌다. 수도권 신도시 대단지 아파트에서 소시민으로 섞여 살며 갈망했던 익명성을 여한 없이 누린다. 하지만 가뿐한 개인주의자의 삶을 살면서도 고단할 때면 어김없이 배릿한 바다 냄새와 고향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명절 때마다 언제 집에 내려오느냐고 채근한다. 머리는 희끗희끗해졌지만 장난기 어린 표정은 여전한 그들을 만나면 맥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일순 무색해진다.
도루묵찌개를 안주 삼아 예전의 그 ‘경월소주’에 비하면 맹탕인 소주를 기울이며 함께 나누는 이야기는 결국 얽히고설킨 관계의 일상이다. 뉘 집 누구와 누구의 근황을 읊어대는 투박한 사투리가 정겹다. 어느 별에선가 휙 날아와 떨어진 운석인 양 빤빤하게 굴어도, 어쨌든 내 잔뼈는 그 너른 오지랖과 눈길 속에서 굵은 게다.
한국 사회는 2011년 리투아니아를 제치고 인구 10만명당 31.7명으로 자살률 세계 1위에 등극했다. 근간에는 이웃나라 일본의 신조어로 ‘무연사회(無緣社會)’의 징후인 ‘고독사(孤獨死)’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질병으로 사망한 후 한 달여가 지나서야 냄새로 알려진 죽음, 무려 6년 뒤 백골이 되어 발견된 죽음 앞에서 전체 가구 중 4분의 1이 1인 가구가 된 한국 사회는 충격을 넘어선 공포로 반응한다. 언론이 연이어 쏟아내는 고독사와 관련된 기사의 대부분은 외로운 죽음, 방치된 죽음에 대해 개탄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외롭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는가? 가족과 친구에게 둘러싸여 일일이 작별인사를 나누고 평화롭게 ‘잠드는’ 죽음 같은 건 꿈에 불과하기에, 나는 기꺼이 죽음의 고독을 감내할 작심을 진즉부터 해온 차였다. 하여 지금 논란이 되는 ‘고독사’는 기실 ‘고립사’라 불러 마땅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나눠야 할 고민거리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육탈한 시신이 증명하는 것은 생전의 외로운 삶, 방치된 삶에 다름 아니다.
‘큰 재난이 닥쳐오면 각자 날아오른다’는 말처럼 남은커녕 나를 돌보기에도 버거운 시절이다. 애옥한 살림살이만큼 마음이 가난해져 누군가를 살필 겨를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제각각 날아오르려 해도 세상의 그물에 갇힌 채로는 날갯짓조차 버겁다. 신자유주의의 비정한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동승자들과 손잡고 껴안을 수밖에 없음은 연민과 동정을 넘어선 생존의 문제다. 고독의 대가(大家)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말했듯, 고독은 당사자와 다른 사람 사이에 놓인 공간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군중 속의 고독은 더욱 잔인하고 혹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친구의 연고가 모두 끊긴 상태에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이 고립과 소외가 빚어내는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다. 예전의 고향에서처럼 누구네 집의 숟가락, 밥공기가 몇 개인가를 알지는 못해도 누구네 집의 쌀독이 비고 약봉지가 떨어졌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마을의 귀환이 절실하다.
(경향신문DB)
그 마을은 소유주들이 집값을 중심으로 하나 되는 ‘뉴타운’이 아니라 삶터를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문화와 환경과 교육의 ‘공동체’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얼마 전 KBS <수요기획>에서는 ‘재미난 마을에는 재미있는 사람들이 산다’ 편을 통해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을 벌이는 서울시가 모범사례로 꼽는 도봉산 자락의 삼각산 마을을 소개했다. 나 또한 그런 마을에서 아이를 키웠고 지금도 그런 마을을 일구며 살고 있다. 나 같은 개인주의자까지 슬그머니 한쪽 발을 들여놓고 싶을 만큼, 마을은 추상이 아닌 실제로서의 ‘우리’의 삶에 관여한다. 우리의 아이들이어야 안전하다. 우리의 놀이여서 재미있다. 우리의 터전이기에 사랑스럽다.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고립되어 살 수 없다. 그런 삶이야말로 백골이 되어 발견되는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이다. 마을은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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