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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서울을 떠난 지 1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 실종된 것은 ‘삶’이었다. 일상은 계속되었으나 복잡한 관계망 때문에 ‘나’에 대해 주목하지 못하고, 매듭 없는 끈처럼 정리되지 않은 채 지루한 하루 이틀이 쌓여갔다. 가끔 반짝이는 희열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제와 같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강박처럼 나를 자주 슬럼프에 빠지게 했다. 자고로 사람은 추운 겨울날 가슴에 넣은 손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어야 ‘생존’을 확인하듯이, 몸을 움직여 제 몸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땀내를 맡으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다못해 좀처럼 앓아눕지도 못하는 내 건강을 탓하기도 했다. ‘이제 그만!’이라는 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차오른다.
어제는 밤 늦은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 전원을 올렸다. 귀농한 뒤로 텔레비전을 버렸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아이 성화 때문에 3년 만에 들여놓은 텔레비전이다. 요즘은 텔레비전도 진화해 IPTV에서는 영화도 마음대로 골라볼 수 있다. 무작정 시선을 끄는 영화가 있었다. “용기가 필요한 당신을 위한 기적 같은 여행”이라고 선전하는 라이언 머피 감독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주인공 리즈 역을 줄리아 로버츠가 맡았다. ‘노동하고 기도하라’는 베네딕토 성인의 주문보다 한층 진화된 구호다.
시몬 베유가 존경했던 생의 철학자 알랭은 ‘위(胃)의 철학’을 강조했다. 그는 서구철학이 ‘굶주림’에 대해 무심했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시몬 베유는 철학교사로서, 한사코 노동자들의 밥을 위해 싸우면서 ‘장미’를 꽂아주고 싶어 했다. 육신의 요구와 정신의 요구를 통합시킬 줄 알았던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마침내 ‘실천적 신비주의’에 닿았다. 영화에서 주인공 리즈는 안정적인 직장과 번듯한 남편,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버리고 ‘자신이 원했던 삶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 길에서 리즈는 이탈리아에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서 뜨겁게 기도하고, 발리에서 자유롭게 사랑한다.
유쾌한 밥상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이완시키는 일이 또 있을까? 예전에 화성시에 있는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연찬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산안농장’이라고 부르는 이 무소유 공동체를 사람들은 ‘행복한 마을’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풍족하게 먹고 낮잠을 즐기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풍경이다. 잠시 잠깐의 낮잠이지만 노곤한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나면 몸이 상쾌해지고, 곧 이어 가혹한 정신훈련이라 불러야 할 연찬에 들어간다. 아마 리즈는 이탈리아에서 몸의 욕구를 충분히 사랑했을 것이다.
인도는 기도하기에 좋은 곳이라 불러도 될까? 사람들은 시신이 떠내려가는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에서 목욕을 하고, 곳곳에 놓여 있는 사원에서 기도에 몰두한다. 가난이 손톱 끝까지 배어들어간 땅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황금빛 꽃을 팔러 다니고, 걸인들은 적선받은 돈으로 짜이 한 잔을 사서 마신다. 이 걸인들은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신에게 꽃을 사다 바친다. 다음 생애에서는 다시 지옥 같은 이승을 살고 싶지 않다는 갈증 같은 기도다. 리즈가 찾아갔던 아쉬람은 ‘내 안에 신이 머물고 있음’을 깨닫고, 삶의 균형을 찾으려고 찾아든 구도자로 넘쳐난다. 어찌 생각하면, 인도는 가장 참혹한 상황이기에 제 삶을 송두리째 내려놓고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가능한 땅인지도 모른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경향신문DB)
이 영화의 백미는 ‘영원한 사랑’이 가능한지 묻는 것이다. 리즈는 ‘영원한 사랑’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짧고 길었던 사랑을 떠나보내면서, 이제 다시 누군가 사랑하기를 주저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렵게 얻은 ‘삶의 균형’을 깨뜨리고 상처를 덧입히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상담을 청했던 주술사 케투가 마지막 순간에 “삶의 균형은 상처를 통해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간다”고 말하자 ‘용감하게’ 발리에서 만난 사랑에 응답한다. 리즈는 새로운 사랑 펠리페에게 이탈리아에서 배운 말을 전한다. 아트라베시아모!(Attraversiamo). “우리 함께 가자”라는 말이다.
그러나 리즈가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았듯이, 한 개인의 자기애로는 영원한 사랑이 불가능하다. 이웃을 ‘나’의 확장으로 여기는 깨달음이 따라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그 사람의 기쁨에 내가 먼저 기쁘게 반응하는 인간에게만 ‘영원한 사랑’이 가능하다. 여기서 이른바 ‘사회적 사랑’이 발생한다. 고공철탑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오르는 해고노동자를 보면서 내가 먼저 눈물이 앞을 가린다면 나는 그 순간 영원한 사랑에 직면한 것이다.
리즈가 발리에서 만난 가난하지만 다정한 와얀 모녀를 위해 움직이는 순간 그 사건이 발생했다. 민간요법으로 밥벌이를 하던 이혼녀 와얀과 그녀의 딸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해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순간 리즈는 영원한 사랑에 접속됐다. 푸른 타일이 깔린 집이 발리에 지어진다. 푸른빛은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의 색깔이다. 세상을 품어 안는 그 자비 안에서 영원한 사랑은 이따금 우리 곁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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