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문화와 삶

따로 또 같이

opinionX 2017. 3. 30. 10:50

혼밥과 혼술이 보편화됐다. 서울의 뜨는 동네들은 대규모 연회석보다는 1~2명을 상대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예 ‘혼술 환영’을 내건 가게들도 종종 보인다. 20대의 17%, 30대는 18%가 1인 가구다. 30대도 지난 나 또한 1인 가구다. 언젠가 생각을 해봤다. 이대로 혼자 살아도 괜찮을까?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살림 같은 건 충분히 가능하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을 거의 타지 않는 편인 데다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기에 혼자서 밥도 잘 먹고 자잘한 살림도 싫지 않다. 여전히 혼자 사는 친구들도 많으니 밤이 외롭지도 않다. 유효 기간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연애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가정을 이룬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여행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물론 이건 프리랜서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어느 나이가 되면 대학을 가야 하고 또 어느 나이가 되면 취직을 해야 하고 그리고 어느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국 어느 나이가 되면 부모가 되어야 하는, 당연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은 인생의 매뉴얼북만 집어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면 혼자 산다는 건 충분히 매력적이다.

서울의 한 할리스 커피 매장에서 손님들이 1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다. 혼밥, 혼술 등 ‘1인 소비’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할리스는 최근 주요 매장에 1인 좌석 및 도서관 형태의 분리형 좌석을 설치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인생이란 뭔가가 일어나기 때문에 인생인 법이다. 나에게든, 남에게든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일어난다. 반드시 그렇다. 몇 년 전, 혼자 살던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전날 밤까지 친구들이랑 거하게 마신 후 집에서 쓰러졌다. 함께 사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119를 불렀을 것이고, 소생의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동안 꼬박 방치돼 있었다. 그는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갔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혼자 살았다. 슬픔을 나누고자 만든 술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우리 매일, 아니 며칠에 한 번이라도 안부 문자라도 주고받으면서 살자.” 물론 말뿐이었다. 혼자 살지언정 매일 가족들과 안부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연애를 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또 하나의 리스크가 있다. 늙어가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은 끼리끼리 갈라진다. 가족을 꾸리면 가족 단위의 모임이 생기고, 아직 그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은 소외된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뜸해지더니 그렇게 비웃던 카카오스토리에 아기 사진을 올리는 친구를 봤을 때의 당혹감이란! 그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나만 쏙 빼놓고 가족끼리 휴가를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서러움이란! 술자리 맹세의 허무함을 깨닫는다.

가정을 만들기는 싫고 (혹은 자신이 없고)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공동체를 만든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이는 작은 공동체부터, 아예 시민운동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공동체까지. 1인 가구가 늘어가면서 후자의 실험들도 이어지고 있다. 혼자 사는, 그러나 콘텐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며 일상 속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꾸려내고자 만들어진 서울 성수동의 ‘디웰’ 같은 경우도 있고 시민단체에서 주택을 구입, 개조한 후 임대하는 형태도 있다. 이런 시도의 공통점은 현대의 주거 문화와는 달리 교류를 중점에 둔다는 데 있다. 생각해보라. 이웃집 사람과도 인사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우리의 생활이다. 아파트에 살건, 원룸에 살건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알고 산다는 시골 마을을 부러워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런데 막상 닥치면 불편하다.) 요컨대 집단주의의 환상과 개인주의의 편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과도기적 상태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갈망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의 절충점일 것이다. 가족으로 대변되는 1차 집단도, 학교로 대변되는 2차 집단도 아닌 세대와 취향의 새로운 집단. 디지털시대가 만든 3차 집단 내부의 시도라는 이야기다. 원치 않는 간섭은 피하되, 이웃의 따뜻함은 누릴 수 있는 그런 공동체에 대한 시도 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인류는 주거 환경을 바꿔 왔다. 세대라는 개념이 등장한 게 반세기가 지나지 않은 지금, 인생의 매뉴얼북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세대의 실험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민낯  (0) 2017.04.13
글쓰기의 불안함  (0) 2017.04.06
죽은 시니어의 사회  (0) 2017.03.23
내면과 풍경  (0) 2017.03.09
윤이상이라는 이름  (0) 2017.02.23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