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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사인 지인이 “요즘 학생들은 선생님을 존경하지도, 정을 주지도 않아서 예전만큼 가르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탄하자, 부인께서 담담한 어조로 폐부를 찔렀다고 한다. “그 아이들도 젊은 선생님들한텐 다를걸.”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크게 웃다가, 남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늙음에 대한 자인(自認)은 환멸을 수반하는 계몽적 인식과도 같다는 사실을.
오늘날 노년이나 늙음과 관련된 문제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형편에 처한 듯하다. 늙음 자체보다는 제대로 늙을 수 없다는 것이 새로운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평생직장 개념이 붕괴한 무한 경쟁사회, 끝없는 자기혁신과 평생학습의 구호 속에서 한국인들은 더 이상 늙을 수가 없다.
사회적 안전망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호모헌드레드’ 시대의 개막이라는 소문은 불안만을 가중시킨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이 허튼 표현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실제로 늙지 못한 채 나이만 먹고 있다. 낡은 것이 초단위로 폐기되는 사회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젊음을 유지하고자 한다.
늙거나 낡아서 오히려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고전문학이나 고전음악과 같은 ‘고전(古典)’ 텍스트가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고전의 가치조차 ‘새로운 것’ 혹은 ‘미래의 것’과의 관련성을 증명할 때에만 비로소 승인된다.
이 시대의 고전은 ‘명문대 선정 고전문학 100선’과 같은 표식을 붙이고서야, 혹은 종종 ‘K’자가 붙는 한류 문화 콘텐츠 개발을 위한 문화자원으로서 내세워질 때에야 그 효용이 인정된다. 미래를 위한 전략과 투자에 쓸모 있는 낡은 것들, 한국에서 고전이란 말하자면 재건축 가능성이 있는 낡고 비싼 아파트와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전체가 사실상 ‘새로운 것’에 대한 추종과 ‘낡은 것’에 대한 폐기와 개조의 역사다.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맹종이 극에 달했던 시기가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박정희의 철권통치 시절이다. ‘근대화’가 동네 슈퍼의 이름이기까지 했던 당시에 ‘새로워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이었다. ‘새마을운동’과 ‘새마음운동’, 이 시대 권력의 요구에 응답했던 순박한 국민들은 ‘새로움’을 향한 일사불란의 행진 대열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리고 한 세대 이상이 지난 지금, 그들 가운데 일부가 리프팅 시술을 거듭한 ‘유신(維新)의 공주’와 함께 제때 늙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채 이른바 ‘태극기집회’에 모였다. 한 손에 성조기를 들고 여전히 저 1970년대식 근대화에 대한 청춘의 신념을 불태우면서.
그러니 촛불광장의 젊은이들로부터 ‘틀딱’(틀니 부딪치는 소리라는 뜻)이라 조롱받는다고 해서 그들을 주책없는 ‘늙은이’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새로움’을 추구했던 세대라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요컨대 우리가 ‘틀딱세대’로부터 진정으로 청산하고 결별해야 할 것은 그들이 가진 유신의 기억, 반공 이념으로 화한 맹목적 개신(改新)의 신앙이다.
촛불시민의 자격이 ‘젊음’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청산해야 할 적폐를 늙음이나 낡음 그 자체로 착각할 경우 ‘틀딱’은 차례로 1980년대 민주화 세대, 1990년대의 IMF 세대, 심지어 2010년대의 세월호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돌아보면 세월호 참사의 주원인 가운데 하나가 불법적 ‘개조’였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대응 또한 적반하장 ‘국가개조’였다. 대통령 탄핵선고 이후에도 적폐의 정치인들은 대놓고 ‘개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새로워져야 할까?
모든 나이 듦이 ‘꼰대질’과 ‘갑질’이 되는 사회, 더 이상 향기 나게 늙지 못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죽은 시니어의 사회’는 젊은이들에게도 불행한 사회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미래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촛불의 광장은 ‘새로운 것’을 위한 자리만은 아니었다. 광장의 촛불이 밝혀주었던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낡고 진부한 이념이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소중한 것은 종종 그렇게 낡고 오래된 것들 속에 있다.
최유준 전남대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