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새해 첫날 논산집 거실에서 선물 받은 풍물북 한 면에 나는 이렇게 썼다. ‘從心所欲 不踰矩(종심소욕 불유구)’, 공자가 이르되 나이 칠십은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거야 쉰 살의 지천명(知天命), 예순의 이순(耳順) 경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일 뿐, 천명조차 깨닫지 못하고 늙는 대부분의 사람에겐 어림없는 꿈이 아니겠는가. 성희롱으로 재판에 부쳐진 전 국회의장님은 올해 나이 일흔일곱이다. 그래서 나는 풍물북 아래쪽에 이어서 이렇게 썼다.

“이제 겨우 일흔이 되었구나!”

‘겨우’라는 낱말에 나는 방점을 찍었다. 공자는 지금 같은 고령화 사회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노인 인구비율은 2010년 이후 두 자리 숫자로 진입해 빠르게 성장해 왔으며 2017년엔 14%를 넘길 것으로 예측된다. 2050년 세계의 노인 인구비율이 16.2%가 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38.2%가 되리라는 보고서를 본 적도 있다. 노인들을 상대로 한 앙케트 조사에서 노인을 몇 살로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70세’라고 응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던 것도 시사적이다. 하기야 65세-노인이란 것도 서구사회에서 전파된 근거 없는 기준을 따른 것이다. 노인에 대한 많은 고정관념, 이를테면 노인은 병주머니다, 노인은 우울하다, 노인은 기억력이 없다, 노인은 인자할 뿐이다, 라는 것도 일부 노인에겐 헛소리에 불과하다.

어떤 강연에서 세대간극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 한 청년이 통계청 자료를 들먹이면서 2030년이 되면 인구 3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게 되는데 그래도 사회가 무조건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느냐고 묻는다. ‘싸가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방적인 관계는 온당하지 않아요. 노인 자신도 자기를 스스로 돌보게 도와야지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앉아서 나이대접만 받기 바라는 어르신이 있다면 젊은 여러분이 당근과 채찍으로 가르치세요. 그분들이 어렸을 때의 여러분을 가르쳤듯이. 함께 살아야 하니까요.” 청년은 그러나 내 말을 얼른 수긍하지 않는 눈치였다. 노인과 젊은 자신 사이를 새누리당과 진보신당쯤으로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정책의 대부분이 노인과 노인이 아닌 사람들의 편 가르기 강화에만 기여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삽화다. 노인정책에서 제 대접을 수반하는 ‘일자리 창출’은 거의 회자되지 않는다. 일하고 싶은 ‘일흔 청춘’들까지도 ‘짐짝’으로 취급될 뿐이고, 그 태도는 정책 입안자나 그 정책 자체에 의해 재빨리 유포된다. 노인문제만 그런가. ‘생각하는 백성’이었던 우리들은 어느새 ‘생각’을 모조리 버리고 습관적으로 세상의 모든 걸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익숙해졌다. 세상엔 이미 갑과 을, 흡연자와 비흡연자, 보수와 진보, 청년과 노인밖에 없다. 정책, 혹은 정책의 주관자들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의 확장’을 줄기차게 가로막고 제 스스로의 편의만을 쫓아 ‘꼼수’로서의 담론을 확대재생산해 유포시킨 결과가 이렇다.

각설하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면 그의 묘지를 남몰래 내 가슴 속에 써왔다. 나를 버린 첫사랑의 그녀, 이념적 불화로 헤어진 선후배, 불공정한 사회구조에 따른 사소한 오해로 멀어진 친구, 자본주의적 환경 탓으로 결별한 이웃들이 내 가슴속 묘역에 잠들어 있다. 이상한 일은 나이가 드니 묘역에 잠들어 있던 그들이 때론 부스스 깨어나 묘지를 뚫고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슬비 오는 아침, 어느 굽잇길을 돌아드는 저녁, 성긴 꿈자리에서 불현듯 깨어난 한밤중, 나는 자주 묘지를 뚫고 나온 그들과 마주친다.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내 세대가 공유한 기억 속의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 그 명분과 실제 사이의 가짜논리들도 그러하다.

추억은 감미이거니와, 성찰은 힘이 된다. 내 경우, 나는 가슴속 묘지를 뚫고 나오는 그들을 내 나잇값에 맞춰 정성껏 영접한다. 기억에게 억압당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억압은커녕, 젊을 때보다 사려 깊이 볼 수 있는 넓이를 부여받은 걸 축복이라 여길 때도 있다. 그것들은 때로 자책감을 부르고, 때로 남은 생의 실천적 에너지로 내 안에 비축된다. 생이 남아 있는 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나를 자주 다독거린다. 나는 이제 ‘겨우’ 일흔이 됐으니까.

철거 잔해 위에서 누워있는 노인 (출처 : 경향DB)


달라져야 하는 것은 정책만이 아니다. 노인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떤 정책인들 효과는 반감될 게 뻔하다. 노인과 청년의 확실한 차이점은 기억의 총량과 그 편차이다. 이를테면 노인이 기억하는 가난은 일제, 분단, 굶주림, 추위 같은 것이고 청년이 기억하는 가난은 편의점 라면, 고급 빌라 옆의 지하셋방, 주류문화에서의 불평등-소외 같은 것이다. 노인의 머릿속엔 6·25, 새마을, 광주, 부동산투기 같은 게 들어있지만 청년의 머릿속엔 청바지, 원두커피, 아메리카, 인터넷, 갑을관계 등이 들어 있다. 그들은 각자 떨어진 채 서로 다른 자기 세대의 기억에 과도히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인다. 세계가 편의에 따라 그 기억 덩어리들을 끊임없이 부추기거나 과장-강화시키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유롭기가 더욱 어렵다.

기억을 이길 수만 있다면, 그 상처들을 사려 깊게 넘어설 수만 있다면 노인과 청년의 관계는 물론 심지어 갑과 을, 보수와 진보 사이에도 지금보다 더 합리적인 통로가 열릴 게 틀림없다. 성공했던 기억도, 상처와 불안으로 쌓인 기억도 넘어서야 자유롭다. 가령 ‘땅콩 회항’ 사건도 특권층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다.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또 어떤 기억들인가. 청년보다 노인이, 보통사람보다 지도자가 먼저 기억, 또는 기억 속의 달콤한 특혜, 쓰라린 상처들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는 게 좋다. 그래야 일방적 ‘불통’은 쓰러지고 수평적 ‘소통’은 일어서 보편화된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