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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세계지도를 들여다볼 때마다 내가 꿈꾸듯 가보고 싶었던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하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이다. 희망봉은 그 이름 때문에, 바이칼호는 초승달 닮은 그 모양 때문에 끌렸다.


희망봉은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 반도 끝에 위치한 곶의 이름이다. 인도양과 대서양을 가르는 기점이며,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할 때 희망의 징후로 삼았던 지표이다. 내가 그곳에 처음 간 것은 ‘6·29 선언’ 얼마쯤 후였던 것 같다. 87년의 ‘6월 항쟁’은 정말 대단한 불길이었다. 청년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와 깃발을 함께 들었고 함께 행진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학생, 남녀노소 시민들과 더불어 밀려나가던 그 뜨거운 함성이 아직 생생하다. 어떤 젊은 학생이 눈물과 콧물에 얼룩진 내 얼굴을 제 손수건으로 닦고 매주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먹밥을 만들어서 가지고 나온 어머니들도 있었다. 청년의 그 손수건, 어머니들의 그 주먹밥이 마흔두살 중년과 맞닥뜨리던 나의 ‘희망봉’이었다.

바이칼 호수에 간 것은 그보다 십 년쯤 후인 1996년 여름이었다. 남북으로 600킬로미터가 넘는 이 호수를 찾아갈 때 나는 우리의 고서 중 하나인 <삼성기(三聖記)>를 읽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역사 이전 우리 민족의 원조로 알려진 천제한님이 ‘천해(天海) 동방 파나류산 밑에 한님(환인·桓因)의 나라를 세운’ 바 있는데,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나 된다고 했다. 중종 때의 선비 이맥(李陌)도 <환국본기(桓國本紀)> 서두에서, 그 나라를 가리켜, ‘순리대로 잘 조화되어… 어려운 자를 일으키고 약자를 구제하여… 어긋나는 자 하나도 없었다’라고 썼다. 천해란 북해를 말하고 북해란 바이칼호를 이를진대, 이를테면 나는 우리 민족이 최초로 이상적인 나라를 세웠던 그곳, 바이칼 동쪽 땅에 오십대 중반 처음 발을 디딘 것이었다. 나는 이르쿠츠크를 거쳐 바이칼 한가운데 올혼섬까지 들어갔다.

서울집으로 전화를 건 게 화근이었다. “큰일 났어요. 딸애가요, 경찰한테 쫓겨 연대 과학관으로 들어갔는데요, 실험 기자재가 많아 잘못하면 과학관 전체가 폭발할는지도 모른대요!” 아내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민족의 시원을 따라 걸어볼 새도 없었다. 아비로서 딸조차 공권력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한다면 민족의 시원이 무슨 소용이랴. 나는 곧바로 귀국했다. 이른바, ‘연세대 사태’는 범민족대회에 참가하러 북에 갔던 한총련 학생의 귀환에 맞춰 열린 ‘통일축전’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건이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에도 과학관에 갇힌 수천명의 학생들을 1만2000여 경찰들이 물샐 틈 없이 에워싸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난 이대로 못 있어. 딸한테 갈 거야!” 전사처럼 머리를 질끈 묶어 맨 아내가 말했고, 나는 유구무언이었다.

어찌어찌, 경찰의 포위망을 따돌리고 들어갔을 때 과학관은 그야말로 만원이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수많은 학생들이 먹을 것 마실 것조차 단절된 채 격리돼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뜻밖에 밝아서 나는 먼저 놀랐다. 갇힌 자들의 절망과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토론하는 그룹도 있었고 게임하는 그룹도 있었다. 대학 1학년짜리 딸애는 시멘트 복도에서 신문지 한 장을 깔고 누워 있었다. 아내는 딸을 안고 우는데 딸애는 순하게 웃었다.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신문지 한 장으로 밤낮을 어찌 견디느냐는 제 엄마의 말에 대한 딸애의 대답이다. “엄마, 신문지 한 장이 어딘데. 돈 주고 팔라는 선배도 있어, 이 신문지!”

 

한총련 사태로 폐허가 된 연세대 교정을 정리하는 학생들 (출처 : 경향DB)

나이가 먹는 건지, 요즘은 자주 지금보다 더 고통받았던 시절을 생각한다. 못 먹어서 배고팠던 어릴 때, 절대빈곤의 사슬을 끊으라는 사회적 명령을 늘 받았던 젊은 시절, 그리고 정치 문화적 억압을 향한 저항의 불길 같은 대오를 갈팡질팡 지나쳐 온 중년, 혹은 장년의 나날들. 우리처럼 한 세대에 걸쳐 질풍노도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온 민족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어법적으로 말하자면, 그 고통, 그 변화, 그 굴곡들이 우리의 유일한 자원, 자기 갱신을 위한 에너지의 보고였다. 굴곡진 고비마다 정파와 세대와 지역을 넘어서서 최소한 ‘화염병’을 어디에 던져야 할는지 우리들은 그때 알고 있었고, 그래서 뜨겁게 공유했다. 대의를 믿는다며 ‘신문지 한 장’을 행운이라 여기던 사람들이 살았던 전설같은 시대였다.

그래서 나는 또 묻는다. 그 시절에 비해 무엇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잊혀진 세월호’를 보라. 억압은 그 프로그램이 정교해져서 어디에 대고 무엇을 외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부자는 되었으나 독식의 체제가 깊어졌으니 우리는 여전히 가난하고, 더불어 복 되자고 말은 많지만 우리는 더 뿔뿔이 흩어져 날로 지리멸렬, 고독할 뿐이지 않은가.

내가 정말 그리운 건 갱신을 향한 욕망들이 합쳐져 만드는 불길, 혹은 그것을 이끌어내는 마중 봉홧불 같은 것이다. 빌딩을 높이는 것, 인터넷 접속시간을 앞당기는 것, 경제지표의 상승을 발전이라고 예찬할 수는 없다.

본원적인 갱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불을 붙이지 않고 얻는 발전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맥은 앞서 인용한 <환국본기>에서 이르되, 우리 조상들이 바이칼 동쪽에 세웠던 ‘천제한님’의 나라는, ‘친하고 멀다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고, 윗사람 아랫사람이라 하여 층하를 두지 않았으며, 남자와 여자의 권리를 따로 하지 않았다’면서, ‘원망하거나 어긋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올 한 해, 경제지표의 상승만이 아니라, ‘원망하거나 어긋나는 자가 하나도 없는’ 나라에 대한 올곧은 지향과 이상의 속 뜨거운 복원을 사회 곳곳에서 보고 싶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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