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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의 날 즈음에 공개된 미국 CIA의 고문 실태 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유용한 정보를 별로 얻어내지도 못’하면서 혐의자들을 감금, 잠 안 재우기나 물고문 등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 칭송되는 미국의 국가조직이 저지른 일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고문용어도 나왔다. 이를테면 ‘직장(直腸) 급식’ 같은 말. 항문으로 물이나 음식을 강제 주입해 조직이 찢어지거나 만성출혈, 탈장을 유도하는 고문방법이다.

고문으로 숨진 사람도 있었다. 피고문자 일부는 아무런 혐의조차 없는 민간인들이었다. 고문이 자행되던 당시의 미 대통령과 정보국 간부들은 ‘인간적인 심문방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정보를 얻고 있다면서 고문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사실을 인정했다. 놀랍고 또 끔찍하다.

우리에게 이런 폭력이 낯선 것은 아니다. 이른바 중앙정보부 시절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고문의 실태는 CIA의 실태를 훨씬 능가했을 정도였다. CIA가 적성국가의 국민을 상대로 자행한 것에 비해 우리의 중앙정보부는 정적이라는 이유로 자국민에게 고문을 일삼았다는 게 다르다면 다르다. 하기야 그것이 뭐, 단지 미국이나 우리만의 문제겠는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이성주의 철학적 전통이 가장 깊었던 독일인들이 선거로 만들어준 국가조직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였다. 일본이 명백한 역사적 범죄를 국가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걸 매일 보고 확인하는 것도 끔찍하긴 마찬가지다.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광범위한 폭력이 국가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폭력이 줄지 않는 게 국가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건 물론 아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폭력도 그렇다. 돈을 앞세운, 자본주의적 폭력의 창궐은 이미 도를 훨씬 넘었다. 문명의 외형적 발달과 상관없이 폭력적인 충동은 어찌된 노릇인지 개선될 기미를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일찍이 프로이트가 파괴의 정열-죽음의 본능이라고 명명한 바로 그것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욕망에 따라 상대편을 무조건 굴복시키고 싶은 그것. 아니 욕망이 있든 없든 약한 자를 무조건 해치고 싶은 사디스트적 공격충동인 그것. 오랜 이성중심주의 역사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의 본능은 왜 완화되지 않는가. 더 약한 자를 습관적으로 가해하려는 본능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포유동물 중 인간뿐이다.

이를테면 단지 ‘땅콩 회항’ 사건이나 아파트 경비원 폭행사건 등에서 보여지는 ‘갑질’로서의 잔인성, 의견과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 폭력적 비난을 일삼는 무절제한 공격성, 나와 얼굴색만 달라도 무조건 미워하는 더러운 배타성, 층간소음 등 하찮은 이유조차 참지 못하고 살인도 불사하는 극단의 분열성, ‘소수의견’이라 확인되면 무조건 짓밟고 내쫓아도 된다는 식의 파시즘적 편협성 등이 다 폭력충동에 따른 가해의 원형이다. 문제는 경제의 발전, 민주화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런 파괴적 충동이 줄기는커녕 더 내면화되거나 일상화하며 우리를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굴절된 현대사가 드리워준 어두운 심리적 배경과 그것을 조절하지 못하는, 조절은 고사하고 오히려 약육강식을 더 조장하는 세계사적인 사회-정치적 구조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지금의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아래 위 할 것 없이, 좌우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계속 폭력적인 ‘파괴의 정열’에 삶을 더욱 깊이 내맡길 가능성이 많다. 이런 충동은 지도층에 의해 날로 확대 재생산되는 형국이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 또한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이 구조에서 살아 견디려면 우리 모두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선근(善根)조차 무참히 버리고 공격적 파괴의 충동을 숙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내던져지는 주사위의 숫자에 따라 운명을 내맡길 수는 없다. 단지 생산성 제고를 통해 더 성능 좋은 몇몇 도구들을 얻는다고 해서 그걸 감히 발전이라고 믿을 정도로 인간이 본래 저급하다고 믿고 싶지도 않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겐 파괴의 정열-죽음의 본능 이외에 또 하나의 정열이 있는바, 삶의 정열-사랑의 본능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힘센 사람들의 ‘쌈박질’을 벤치마킹할 필요는 없다. 우리들에게 공격적인 충동을 강화시키려는 전략, 바꿔 말해 ‘폭력의 컨설팅’을 통해 제 몫을 챙기거나 기득권을 수성하려는 자들, 혹은 그 구조를 믿고 의지해서도 안 된다. 폭력의 조직적 컨설팅을 도모하는 온갖 명분에 속아 그 들러리가 되는 것은 더욱더 곤란하다.

아무리 신은미 콘서트가 종북을 종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번 폭발 사건은 지나친 폭력의 산물이었다. (출처 : 경향DB)


거의 매일 눈이 내리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눈발 속을 어린 송아지처럼 내달리고 싶은 유순한 삶의 정열이 폭력적 뉴스들 때문에 매일매일 참담하게 중절되는 2014년 연말이다. 예컨대 노동자 차광호씨는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여 구미공장 굴뚝에 오른 지 벌써 200일이 넘는다. 도심의 전광판 위에도, 쌍용자동차 굴뚝 위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있다. 노동자 몇 사람조차 지상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세상인데 신문·방송은 여전히 국회나 청와대 권력의 그림자놀이 생중계에만 바쁘다.

그사이에도 사람들은 자꾸 허공으로 올라가거나 주검이 되어 지하에, 바다 밑에 가라앉는다. 허공에서, 캄캄한 바다 밑에서 성탄을 맞는 사람들에게, 세계의 구조적 폭력에 의해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정열-사랑의 본능을 나누는 데 인색한 사회를 민주-복지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

지도그룹이든 개인이든 간에, 2015년에 우리가 온 힘을 기울여 성취해야 할 것은 죽음의 정열-폭력적 충동의 완화라고 난 생각한다. 경제가 백 번 좋아져도 파괴적인 본능에 기대고 살면 황막한 사막으로서의 역사가 계속될 뿐이다. 국가주의-정파주의-자본주의적 폭력의 구조를 똑바로 인식하는 데서 새해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생명값을 증진시키려는 관용과 통합의 감각적 체험을 통해 반인간-반문화-반민주적 세계구조의 개종을 가슴에 새기는 2015년이기를. 삶의 정열-사랑의 본능에 오로지 복무해야 불안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를 얻는다. 그런 지향이야말로 민주사회의 마지막 꿈일 것이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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