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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에 동원된 대표적 범죄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다. 국정농단과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기소된 이가 전직 대통령과 사법부 수장을 포함해 십 수 명에 이른다. 사실 직권남용죄는 기소건수나 유죄가 인정된 사례가 적다는 점에서 잊혀진 범죄유형이다. 기소도 2~3%에 불과하고 유죄판결을 받는 공무원도 거의 없었다. 과거 정권교체기마다 반짝 등장한 적이 있지만 이번 적폐수사처럼 검찰이 비장의 무기로 활용하지는 않았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이 서슬 퍼런 칼날을 세웠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본격화되면서 직권남용죄의 고소·고발이 폭증했다. 연평균 5000~6000건에 불과하던 고소·고발 건수는 2017년 들어 9741건, 지난해에만 1만4345건을 기록했다. 상급자와 의견충돌이 있거나 조금이라도 지시가 부당하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소·고발이 남발되는 경향도 있다. 공직사회에서 경쟁자를 견제하고 흠집 내기 위한 목적으로도 오용되고 있다.
부메랑인가, 부정적 학습효과인가. 남발의 후과인가, 후유증인가. 시민의 권리의식이 높아진 것인가, 공무원의 직무수행에 대한 감시가 강화된 결과인가. ‘직권남용’으로 기사검색을 해 보니 최근 1주일 새 고소·고발이 무려 3건이다. 모두 사회적으로 이목을 끄는 사건들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반감을 가진 세력의 되치기도 있다. 탄핵정국에서 국정농단 주범들의 직권남용을 강력하게 비판하던 세력들을 겨냥한 역공성이다. 다분히 정쟁을 벌이고 흠집 내기 의도가 보이는 고소·고발전이다. 정경심 교수 사건을 맡은 1심 재판부가 검사의 공소장변경 신청을 불허하자 어느 시민단체가 재판장을 직권남용죄로 고발했다. 자유한국당은 황운하 지방경찰청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면서 자신에 대한 수사 종결을 울산지검에 요청한 사실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적시했다고 한다. 자유한국당이 새해 예산안 국회통과 과정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정당한 예산안 심사·표결권 행사를 방해한 명백한 직권남용이라며 문희상 국회의장과 홍남기 부총리를 고발했다. 청와대의 ‘하명수사’ 의혹과 민정비서관실의 누군가도 직권남용으로 수사를 받았거나 수사대상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다수의 정권 핵심인사들이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된 상태다.
직권남용죄의 적용범위가 논란거리다. 넓게 인정하면 공직기강이 무너지고, 복지부동과 보신주의의 소극적 행정행태가 퍼질 거라는 우려가 있다. 직무권한의 범위도 모호하고 남용개념 자체가 추상적이어서 누구에게는 엄격하게, 어떤 사람에게는 관대하게 자의적으로 적용될 여지가 있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잘못하면 정치권력의 반대파에 대한 인적 청산의 사법적 무기로 악용될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고위 공직자들이 직권남용 혐의로 수사받고 기소되는 경우가 늘면서 공직자들이 정쟁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될 수 없을 거라는 비판도 있다. 직권남용죄 규정의 위헌성에 관한 헌법재판소 결정에서 소수의견이 “전임 정부에서 활동한 고위 공직자들을 처벌하거나 순수한 정책적 판단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경우에 공직자를 상징적으로 처벌하는 데 이용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사법부는 그동안 죄형법정주의 원칙과 무죄추정의 원칙 등 헌법원칙에 따라 엄격하게 직권남용죄를 인정하고 있다.
이번 정부의 임기 반환점이 지난 시점에 직권남용죄가 정권 핵심을 겨냥한 부메랑이 되고 있는 이유는 직권남용죄를 남용했기에 예견된 일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래서 직권남용 수사와 재판은 엄격히 제한돼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는 것 같다. 그러나 검찰권 행사와 사법적 판단이 권력에 따라 달라서는 안된다. 어느 정권의 공무원이 아니라 국가공무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사기관과 법원 모두 직권남용죄에 대하여 소극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정치권력의 남용과 고위공직자의 직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직권남용이 권한행사로 정당화돼 왔던 것이다. 급기야 전대미문의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이 벌어졌다.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보복을 가한 검사장, 전 대통령,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민정수석 등 국정농단의 핵심들이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전 사법부의 수장은 재판을 받고 있다. 국가기능과 국가질서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역사의 죄인들이다. 그 원인이 그동안 직권남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검찰과 사법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고소·고발이 남발되더라도 경쟁자에 대한 흠집 내기, 죽이기, 괴롭히기 의도인지 옥석을 가려 국가기능과 국가질서를 허무는 진정 직권남용을 골라내 단죄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와 법치국가가 바로 설 수 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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