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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대학을 졸업한 친척 청년이 백화점에 판매원으로 취직을 했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진가는 취업을 하면서 나타났다. 돈 버는 일에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이고 힘겨운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에 취직한 백화점 일도 단기직 ‘알바’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고용됐다. 워낙 친절해서 백화점에서도 놓치고 싶지 않아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이라고 한다. 어느 날 백화점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데 대학에서 물리치료를 전공한 고교 동기를 만났다고 한다. 그가 친척 청년에게 “여기서 뭐하냐?”고 물어보더란다. 친척 청년이 “나 여기서 일한다”고 하자 친구가 버럭 화를 내었다고 한다. 대학까지 나와서 고작 판매원이냐며 면박을 주고는 휙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내 친척 청년을 면박하고 비웃은 친구의 말은 한국에서 교육과 노동이 어떤 관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사람은 ‘노동자’가 되면 안된다.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인생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친구가 보기에 친척 청년은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단순 몸빵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교육의 ‘실패작’인 셈이다. 친척 청년 역시 그렇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노동계급 자녀들에게서 나타나는 ‘반학교 문화’에서 노동자들을 분할하는 방식과는 정반대다.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에 따르면 영국의 노동계급 자녀들은 학교의 지식을 탁상공론이라고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자신의 부모이자 동네 아저씨들인 육체노동자들의 지식을 ‘진짜’ 살아 있는 지식으로 여긴다. 그들은 노동의 세계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 분할하고 정신노동은 ‘진정한 노동’이 아니라고 평가절하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이 ‘노동 배우기(Learning to Labour)’다.

폴 윌리스 저 "학교와 계급재생산"


반면 한국의 경우는 ‘노동 부정 배우기(Learning not to Labour)’에 더 가깝다. 한국은 노동을 ‘전문직’ 노동과 ‘몸빵’ 노동으로 나눈 다음 ‘전문직’ 노동만이 가치 있는 노동이고, ‘몸빵’ 노동은 수치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경우와는 반대인 것이다. 작년에 특성화고등학교를 연구할 때도 학생들이 ‘전문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노동자가 아니라 ‘전문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사실상 ‘육체’ 노동을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다. 노동에 ‘전문직’과 같은 말이 붙어야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차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한국의 직업교육 혹은 진로탐색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로’와 ‘직업’은 탐색하지만 그것이 ‘노동’이라는 것은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 직업을 밥벌이 수단이나 혹은 고상하게 ‘자아실현’의 도구라고는 가르치지만 직업을 가지는 것이 노동자가 되는 것이라는 점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 결과 노동에 대해서도, 노동의 세계에 대해서도,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노동을 부정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은수미 의원 등이 발의한 ‘노동인권교육 활성화를 위한 법률’은 매우 환영할 일이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 법안에는 학교 교육과정에 노동인권교육을 반영하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독일은 초등학교에서 노사교섭 놀이를 하고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중·고교 교과과정에 노동과 인권, 갈등과 분쟁, 노사교섭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진로’와 ‘직업’을 넘어 학생들이 노동자로서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배우며 ‘노동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그 어떤 교육보다 한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엄기호 | 덕성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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