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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터키에선 체즈베라는 황동 용기와 달궈진 모래를 이용해 커피를 만든다. 커피는 아프리카 동북부에서 출발해 터키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으로 전해졌고 흔히 ‘비엔나 커피’라 부르는 비너 멜랑주로 탈바꿈했다. 마르세유를 통해 커피를 받아들인 프랑스는 프렌치 프레스라는 변형된 터키식 커피 추출 방식을 발명했다. 핀란드에서는 치즈 위에 커피를 부어 마시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다방커피 맛을 기반으로 개발된 믹스 커피가 사랑받았고, 외국인 관광객은 이 커피를 특산물이라 여기며 사 간다.

커피를 파는 카페의 문화도 나라마다 다르다. 한국식 카페에는 와이파이와 고객용 플러그가 없으면 안되는데, 이탈리아의 카페엔 의자조차 없는 경우도 흔하다. 의자가 있어도 사용하려면 별도의 자릿값을 내야 한다.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카페를 이용하기에 생긴 관습이다. 이탈리아 사람은 보통 카페에 들러 커피에 빵을 곁들여 먹는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다. 오후의 카페 풍경도 우리와 다르다. 커피를 주문해서는 소주를 원샷하듯 서서 단박에 한입에 털어 넣고 재빨리 나간다. 물론 이탈리아에서 커피의 기본은 에스프레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폴리의 카페 ‘감브리누스’는 커피가 맛있다고 소문난 곳이다. 1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이기에 종업원도 제대로 된 정장을 입고 손님을 맞이한다. 테이블석에 앉으면 무려 5유로의 자릿값을 내야 한다. 물론 서서 마실 수도 있다. 카페 입구에 대형 금속 그릇이 놓여 있다. ‘소스페소(sospeso) 커피’를 위한 영수증을 담는 그릇이다. 여기서 잠깐. 이탈리아 카페는 한국의 카페와 계산방식이 다르다. 계산대에서 커피값을 계산하고 영수증을 받아 바리스타에게 전달하면서 주문한다. 물론 바리스타에게 주문부터 하고 나중에 계산해도 된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커피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커피 한 잔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카페 ‘감브리누스’는 ‘소스페소’라는 커피 나눔 방식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소스페소’란 누군가에게 선물의 형식으로 전달하기 위해 잠시 맡겨졌다는 뜻이다. ‘소스페소 커피’는 서로 알지 못하는 시민이 커피를 선물하고 커피를 선물받으면서 연대감을 표시하는 인간관계 형식인 것이다. 작동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계산대에서 자신이 마실 커피와 ‘소스페소’를 위한 커피의 수량을 말하고 값을 치른다. 계산원은 ‘소스페소’용 영수증에 손으로 ‘소스페소’라고 써 주는데, 그 영수증을 입구에 있는 ‘소스페소’통에 넣으면 된다. 나도 계산을 하면서 “한 잔은 나의 것이고, 한 잔은 소스페소를 위한 것입니다.(one coffee for me and one coffee for sospeso)”라고 말했더니 뜻이 잘 전달되었다. 영수증을 받아 ‘소스페소’통에 넣고 그다음 날 카페에 들러 통을 확인했다. 어제 내가 넣은 영수증을 누군가 사용했다. 이로써 내가 맡겨둔 커피는 누군가에게 전달되었다.

잠깐! 우리에게 커피는 기호품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커피는 필수품이다. 돈이 없어 커피를 못 마신다는 것은 한국에서처럼 기호품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다운 삶을 하지 못한다는 정도의 강력한 뜻이 된다. 아무리 가난해도 커피는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발상이 ‘소스페소 커피’라는 아이디어를 이끌어냈다. 친구에게 커피 한 잔 사듯,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커피를 산다는 생각이면 충분하다. 도움을 준다고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도움을 받으려고 인격이 저당잡히는 느낌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으니, 타인의 곤란함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외면하지 않도록 해주는 기발한 시민 사이의 연대 방식 아닌가?

이탈리아는 에스프레소 맛을 자랑한다. 한국의 커피 믹스도 자랑할 만한 독특한 커피 문화이다. 나폴리의 ‘소스페소’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커피맛에 적극적으로 재정의된 시민 간 연대라는 아이디어가 더해진 것이다. 우리에게 커피 믹스는 있다. 이 맛에 어떤 사회적 관계를 추가할 것인가? 현대적 방법으로 인간관계를 적극적으로 재정의해야 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그 대상을 찾아내려면 나폴리가 커피를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요소로 품었던 것처럼, 보다 많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사회가 연대해야 하는 최소한의 것에 대한 적극적 상상이 필요하다. 그것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전달하려고 맡긴 책일 수도, 생리대일 수도, 스마트폰 데이터일 수도, 방 한 칸일 수도 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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