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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3주기, 가만있으려니 견딜 수 없는 불안증이 엄습해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4월의 찬란한 햇살 아래 유채꽃처럼 눈부시게 피어나던 아이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고 배와 함께 침몰해야 했던 이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눈물을 닦기에 바쁘다. 노랫말이 가슴에 와 꽂힌다. “이제 4월은 내게 옛날의 4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국가의 실패’, 인천항을 출발할 때부터 침몰까지의 과정, 정부의 방해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중단된 세월호특조위, 그리고 탄핵을 신호로 처참하게 인양되기까지 세월호에 숨어 있는 본질은 ‘국가의 실패’이며, 실패의 본질을 감추기 위한 불의한 ‘국가폭력’이기도 하다.

실패한 국가와 부당한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살아남은 죄로 참사의 기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등 국가의 실패는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평생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상처의 늪에 가두었다.

17일 오전 전남 목포시 호남동 목포신항 철재부두에서 코리아쌀베지 직원들이 워킹타워를 이용해 세월호 우현에 올라 미수습자 수습 작업에 앞서 선체 조사를 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희생자의 친지뿐 아니라 자원봉사자, 심지어 멀리서 TV를 통해 참사 광경을 지켜본 사람까지도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거듭된 참사를 뚫고 살아남은 우리의 내면은 마치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다를 바가 없다.

깊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처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는 자신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간다. 끔찍한 기억 때문에 수면제를 복용하거나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셔야 잠을 잘 수 있다. 길을 걷다가도 아이를 연상시키는 소리나 향기, 장소를 접하면 깊은 슬픔에 빠져든다. 너무 괴로워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욕구가 솟아나기도 하지만, 그런 욕구 자체를 곧 후회한다. 아무리 아파도 끌어안고 기억하지 않으면 떠나간 아이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과 몸을 아이를 위한 기념비 혹은 분향소로 삼는 것이다.

정신적 트라우마는 신체에도 깊은 흔적을 남긴다.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의 신체는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수많은 건강 문제를 겪게 된다. 만성두통과 근육통에 시달리며, 내부 장기의 기능이 파괴된다. 면역체계가 과도하게 작동해 자가면역질환에 걸리기도 하고, 솟구치는 슬픔을 차단하는 방법을 습득한 결과 자기 기분마저 파악하지 못하는 감정인지불능증에 걸리기도 한다. 이성을 관장하는 영장류의 뇌가 몸을 통제하려고 해도 감정을 조절하는 포유류의 뇌, 위협회피를 관장하는 파충류의 뇌에 트라우마가 깊게 새겨져 계속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겪어본 사람들은 안다. 그래서 트라우마 피해자의 눈에 세상은 트라우마를 겪어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뉜다.

우리 현대사는 연이은 트라우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 4·3항쟁, 한국전쟁, 고문과 조작, 광주민주화운동 등 ‘국가의 실패’와 ‘국가폭력’의 목록은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이들을 위해 국가가 한 일은 무엇인가? 19대 대선을 20여일 앞둔 지금, 차기 정부가 걸머져야 하는 치유의 책무를 되새기고 싶다. 역사는 너무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의 치료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진상규명이 앞서야 하지만, 정신과적 치료만이 아니라 사회적 치유, 그리고 스트레스에 대한 몸의 반응구조를 변화시키는 포괄적이고 전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제 국가가 치유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우리 내면의 살아있는 상처를 보듬어 치유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민주정부가 감당해야 할 첫 번째 책무가 아니겠는가? 이 사명이 완수될 때 비로소 ‘고통을 통해서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인류의 상처, 세계사의 상처까지 보듬는 소중한 치유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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