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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나리입니다. 도시는 순식간에 온 거리를 노랗게 칠하듯 환하게 피어난 저의 모습으로 봄을 알렸습니다. 그간 사람들이 벚꽃 소식에 관심을 너무 빼앗겨 조금은 섭섭한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이 봄을 노란색으로 인식하는 것은 제 덕분이지 않겠습니까? 지역에 따라서는 벌써 꽃지고 잎이 나고 있네요. 저의 한 계절이 가기 전에 마음에 품었던 걱정 몇 가지를 이야기할까 합니다.
제일 아쉬운 일은 개나리의 계절이 너무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예전엔 우리 봄꽃나무들에도 질서 같은 것이 있었어요. 산수유에 이어서 백목련, 그리고 개나리가 피고 나면 진달래, 수수꽃다리를 비롯한 라일락 집안 식구들 다음엔 철쭉 같은 순서 말입니다. 그렇게 아름답고 풍성하게 봄날은 이런저런 꽃소식으로 이어졌지요. 그 사이에 저 개나리가 차지하던 시간들이 꽤 길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꽃을 피우는 조건들이 들쑥날쑥 해졌어요. 혼란스러운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던지 다른 봄꽃들도 때론 늦게 때론 빨리 서로 뒤엉켜 피어나선 순식간에 사라지죠. 기후변화라는 것이 단순히 온난화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참 걱정입니다.
사실, 저 개나리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라는 데엔 약간의 자신감이 있습니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떼 쫑쫑쫑 봄나들이 갑니다~.” 가장 먼저 배우는 동요에도 제가 등장하잖아요. 하지만 제 본질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으신 것은 섭섭한 일입니다. 제가 워낙 흔하고 화려하다 보니 서양에서 들여온 조경수로까지 생각하고 계시는 분도 계시니까요. 하지만 저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입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식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저를 봄에 그냥 어디서나 잘 자라는 좋은 조경수 정도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나무로 대우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금 위안이 된 것은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산림청 국립수목원이 우리나라 식물들의 영어이름을 재정리했는데 저의 영어이름은 우리말 발음 그대로 ‘Gaenari’로 해주었어요. 초밥도 스시라는 일본음대로 전 세계에 통용되듯이 개나리도 그리 불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일명 코리안 골든벨트리(Korean goldenbell tree)라고도 불립니다. 저의 오랜 친구 소나무의 영어 이름도 재패니즈 레드파인(Japanese red pine), 즉 일본붉은소나무에서 코리안 레드파인(Korean red pine)으로 바로잡히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제 걱정은 진짜 따로 있습니다. 세상에 지천인 것이 개나리인데 대부분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심어진 것들이죠. 스스로 나고 자란 자생지는 지금 찾아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 개나리의 존재를 학술적으로 인지하여 알린 것은 팔리빈(Palibin)이라고 하는 러시아 학자의 1900년 기록입니다. 이때는 개나리를 중국에서 자라는 종류와 같은 것으로 인지했지만, 1924년 윌슨(Wilson)이 새로운 변종으로 한국 특산임을 처음 기록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 아널드수목원의 아시아채집담당자로 우리나라의 또 다른 중요 특산식물인 구상나무를 명명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이때 기준으로 삼아 지정한 기준표본이 서울(Faurie, 1901), 진남포(J.G.Jack, 1905), 지리산(Wilson, 1917) 등에서 채집된 표본들인 것을 보면 이미 여러 곳에 개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반도 서쪽에 주로 분포한다는 기록도 함께 있답니다. 1926년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는 변종이 아닌 별도의 독립된 한국 특산종으로 인정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산에서 이 개나리를 만날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혹시 산에서 자라는 개나리를 보셨다고요? 아마도 예전에 심어 두었던 것이 남았거나 산개나리일 것입니다. 진짜 저 개나리의 자생지라면 정말 반가운 일이니 빨리 알려주세요.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개나리꽃은 흔하지만 열매를 보신 분은 많지 않을 거예요. 개나리의 꽃은 자세히 관찰하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흔히 보는 것은 꽃잎 가운데 수술이 길게 올라와 꽃밥이 합쳐지고 그 아래 암술은 아주 작지요. 학술적으로는 단주화라고 부르지만 이해가 쉽게 수꽃이라고 하겠습니다. 수꽃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는 가운데 암술이 길게 올라온 암꽃(장주화)이 맺는데 우리 주변의 꽃들은 대부분 수꽃입니다. 자생지에서 자연스럽게 꽃가루받이가 일어나 씨앗을 맺고, 그 씨앗이 자라 새로운 후손 개나리가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서 삽목이라는 무성번식으로 끝없이 복제되었기 때문이지요. 개체수는 많아도 유전적으로는 매우 다양성이 낮아 어려운 환경이나 질병 등의 변화가 생기면 대응하기 어려운 매우 취약한 상태랍니다. 혹시 궁금하시면 오늘 거리로 나가 제 꽃들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수꽃들만 만나실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저를 너무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어 진짜 저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제가 사라져야 비로소 저의 가치를 알아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봄날이 가듯 이제 꽃지고, 잎이 피기 시작했으니 그나마 제게 주셨던 관심도 사라지겠지요. 잊혀지기 전에 한 말씀 올렸습니다. 더불어 세상사 근심이 많으시겠지만 저를 비롯한 환한 봄꽃들로 행복하시길 소망해봅니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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