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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자신에겐 어떠한 선입견도 없다고 누군가 힘주어 주장한다면, 그건 사실 거짓말에 가까운 과장이다. 누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세상사의 모든 논쟁거리를 직접 세밀히 살펴보고 전후좌우 제대로 검토한 후 의견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세상은 너무 넓고 일어나는 일은 다양하기만 하다. 그래서 우린 종종 편하게 ‘풍문’에 판단을 맡긴다.
선입견은 이 ‘풍문’을 먹고 자란다. ‘풍문’이 만들어낸 선입견이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돌면 아쉽기는 해도 위험하지는 않다. 선입견이 바람이 아니라 바위를 닮기 시작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편견으로 고정된 선입견은 사람의 영혼을 좀먹는 사유방식에 다름 아니다. 혐오는 고정된 선입견이 사람의 뇌를 갉아먹을 때 생긴다. 혐오는 고정된 선입견이 낳은 지적 불능의 상태를 의미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사랑이 쉬운가? 사랑이 마음대로 되던가? 사랑이 이뤄지려면 둘 사이 감정의 강도가 비슷해야 하고, 동시에 서로를 향한 감정이 싹터야 한다. 감정의 강도가 다르면 아무리 상대에 대한 마음이 절실해도 그건 짝사랑이다. 감정의 동시성이 없어도 사랑은 감정의 크기와 폭과 상관없이 실패한다. 이미 상대방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거나,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는 상태에서 나타난 운명의 짝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서가 뒤바뀌어도 사랑은 시궁창에 처박힐 수 있다. 이 모든 관문을 통과해 마침내 사랑에 성공했다면 그건 사실 작은 기적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기적과 같은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이 때로 벽에 부딪힌다. 흔히 쓰는 관용구로 표현하자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줄여서 ‘내로남불’이라는 선입견의 벽이다. ‘내로남불’만큼 사랑에 대한 집합경험을 완벽하게 요약해주는 표현도 없다. ‘내로남불’식의 판단은 넘쳐 흐른다. 누구나 자신의 사랑은 절실하고 완벽하고 절대적이다. 자기의 사랑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며, 단어가 그 절실함을 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신성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남의 사랑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말이 많다. 그 할 말은 대부분 충고로 포장된 쉬운 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힌 단정적 표현인 경우가 많다. 자기의 사랑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문학작품 격이라 생각하면서, 남들의 사랑에서 사람들은 ‘펄프 픽션’이나 포르노의 증거를 쉽게 찾아내곤 한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순간 ‘내로남불’의 불륜도 모자라 패륜이라 판단되어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랑이 있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경우,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 사랑만큼 세상의 모든 ‘풍문’과 ‘속설’과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합동작전을 벌여 쉽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또 있을까? ‘속설’에 따르면 남자와 남자가 그리고 여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면 그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우리의 선입견에 따르면 그런 사랑은 없고 없어야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랑은 있다. 그리고 적지 않게 있다. 단지 ‘혐오’의 표적이 될까 두려워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고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1년에 단 한번 ‘그 사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퀴어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날이다. 올해 18번째로 서울에서 열리는 이 퍼레이드에 참가할 예정이라는 사람과 페이스북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날의 의미를 묻자 그 사람은 “1년 중 단 하루만 열리는 천국”과 같은 날이라 대답했다. “나의 모든 면이 환대받는 1년 중 단 한번만 있는” 소중한 날이기에 혐오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막힌 비유를 들어 퀴어 퍼레이드를 설명했다. “노래를 아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고시원 쪽방에서 살다가 방음이 완벽한 넓은 집으로 이사해서 샤우팅을 시원하게 지르는 날”이라고.
혐오보다는 사랑이 강해야 한다. 사랑이 혐오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혐오보다는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살기 좋고, 혐오하는 인간보다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 쾰른의 퀴어 퍼레이드 사진을 페이스북에 포스팅하면서 한 페이스북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참견하지 말라.”
2017년 올해 서울의 퀴어 퍼레이드가 내건 구호는 너무나 적절하다. “나중은 없다. 지금은 우리가 바꾼다.” 퍼레이드가 열리는 2017년 7월15일, 그날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23번을 길에서 읽는 날이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말없는 사랑이 적은 걸 읽으세요. 눈으로 듣는 게 사랑의 재주예요.” 편견의 안경을 벗고 눈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랑의 재주”를 시연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인 퀴어 퍼레이드에 “나중은 없다”. “말없는 사랑”이 길에서 말하는 7월15일은 1년에 단 한번뿐이다.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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