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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갈수록 긴 글을 읽지 않는다고들 한다. 18~19세기 유럽에서 단행본이 대중화되던 시절에는 <신 엘로이즈>처럼 숨막히는 두께에다 지금 기준으로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소설도 대중의 가슴을 뛰게 했지만 지금은 첫 문단 아니면 제목만 읽고도 ‘노잼’(재미없음을 일컫는 온라인 조어) 판정을 내리고 흘려보낸다. ‘꿀잼’이 아닌 이상 긴 호흡이 필요한 콘텐츠는 갈수록 소비자들에게 외면받는다.

이 같은 현상은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기기와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면서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투자 회사 KPCB의 분석가 매리 미커의 ‘2015년 인터넷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모바일 사용시간은 2008년 0.3시간에서 올해 2.8시간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손바닥만 한 모바일의 작은 창에 담긴 사진과 짧은 텍스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유되고 확산된다. 이 같은 콘텐츠에 익숙해지다보면 원고지 20장 길이의 글도 상대적으로 대하소설처럼 느껴진다. 길찾기 같은 ‘요약’ 없는 긴 글의 행간 사이를 헤매도록 만드는 건 바쁜 사람들에게는 불친절 그 자체다.

한 남성이 자신의 스마트폰 사진첩을 확인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 같은 영향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주요 블로그 서비스의 트래픽이 지난해부터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2013년 야심차게 선보였던 블로그서비스 ‘미디엄’은 트래픽 성장이 멈췄고, 또 다른 서비스인 워드프레스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박상민씨는 이에 대해 전 세계 사용자가 14억명에 달하는 “페이스북이 오프라인 지인 관계에서 나아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퍼블리싱 플랫폼까지 모두 먹어치우는 양상”이라고 진단했다. 페이스북은 언론사 콘텐츠도 ‘인스턴트 아티클’ 서비스를 통해 자사 플랫폼에 끌어들이면서 기사링크가 열리는 몇 초의 시간을 지루하게 기다리는 독자를 배려하기 시작했다. ‘노잼’이야말로 모바일시대의 악덕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저널리즘의 고민은 한층 깊어진다. 읽는 데 10분 이상 걸리는 묵직한 스토리텔링 실험이나 개발이 복잡한 뉴스 콘텐츠는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볼 때 언론사에서 매력을 잃게 될 수 있다고 에밀리 벨 컬럼비아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최근 가디언 칼럼에서 지적했다. 언론사들은 이제 모바일 기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소비될 더 많은 동영상과 사진을 비롯한 콘텐츠를 낮은 비용으로 확보해야 한다. 지면기사에 익숙한 방식의 글쓰기도 달라져야 한다. 종이가 한 시대 콘텐츠 문법의 바탕이 된 것처럼, 모바일 화면이 다음 시대의 콘텐츠 문법을 견인하고 있는 셈이다. 전통적 언론사들의 ‘노잼’ 콘텐츠는 갈수록 외면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꿀잼’이 반드시 미덕인가. 닐 포스트먼이 <죽도록 즐기기>에서 텔레비전의 등장 이후 정치사회의 공적담론들이 ‘쇼비즈니스’화되는 현상을 지적했듯이 모바일의 등장 이후 달라지는 담론의 결 역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적잖은 문화 콘텐츠 생산자들이 소비 호흡이 짧은 모바일 기기를 사용한 이후 ‘사고의 지구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토로한다. 내 것으로 체화되지 못한 채 빠르게 손가락 끝을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허무함도 말한다. 자신과 사회적 계급과 지향점이 비슷한 사람들과 정보를 교류하는 과정에서 확증편향의 덫에 빠질 위험도 있다. 좋은 직관은 수고스러운 학습을 통해 얻는 선물인데 인터넷을 통해 스쳐간 정보는 그 같은 학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모바일은 새로운 노마드가 된 현대인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현대인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는 양날의 칼 같은 혁신이기도 하다. ‘꿀잼’을 찾아 터치스크린을 헤매는 나의 손가락은 ‘콩’이란 보상을 얻으려고 부리를 놀리는 실험실의 비둘기와도 닮아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단 것 많이 먹으면 이가 썩는다고 했으니 오늘부터는 ‘꿀잼’ 챙길 때 스스로를 단속해야겠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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