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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개혁, 미래를 위한 생존전략입니다.” 얼마 전부터 거리 전광판마다 일제히 등장한 글귀다. 왠지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규제 개혁이라는 말 속에 숨겨진 의도와 생존전략이라는 낱말이 주는 위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규제 개혁이라는 말은 중립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시시비비 대상에서 비켜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정부가 외치는 규제 개혁은 반쪽짜리다. 규제 강화는 없고 오직 규제 철폐만 있다. ‘규제는 쳐부술 원수이자 암덩어리’이고, ‘규제를 모두 물에 빠뜨려 놓고 꼭 살려내야 할 규제만 살릴 것’이라던 대통령의 발언이 이를 증명한다.

만일 정부가 규제 개혁을 생존전략으로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생존이 ‘돈벌이’만 뜻하는 게 아니라면, 규제 개혁이 가장 합리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곳은 생명안전 분야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미세먼지 공포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렇다. 이 두 가지 사태의 원인을 들여다보면 국민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암덩어리는 규제가 아니라 규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규제 완화’였음이 드러난다.

어찌됐든 대통령이 가습기 살균제 사태의 철저한 조사와 피해자 구제를 주문하고 미세먼지와 관련해 특단의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나 정치권이 사태의 심각성과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과거처럼 정치적 생색내기나 헛다리짚기가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역사상 최악의 환경재난으로 기록될 것이다. 피해 규모와 범위가 이탈리아의 세베소 사건이나 스위스의 산도즈 사고, 더 나아가 미국의 러브캐널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망자만 266명에 달하는 이 사건을 국제사회는 ‘한국판 미나마타 참사’로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 쟁점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핵심은 책임 규명, 피해자 구제, 재발방지책 마련 세 가지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가해자가 누구인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검찰이 수사 범위를 넓혀 공무원들까지 수사할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법적이든 도덕적이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명단은 이미 나와 있다고 봐야 한다. 반면 피해자 판정과 배상은 쉽지 않을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던 잠재적 피해자 수가 약 800만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억울한 사람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특히 3·4등급 피해자들의 구제 여부는 뜨거운 쟁점이 될 것이다. 재발방지책 마련은 분리돼 있는 공산품 안전관리와 화학물질 안전관리를 통합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환경재난 관점에서 보면 미세먼지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미세먼지가 심해지면 천식과 급성 심정지로 인한 사망자가 큰 폭으로 늘어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규명된 지 오래다. 국내외에서 나온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석탄화력발전소들이 내뿜는 초미세먼지만으로도 한 해 최소 1000명 이상이 조기 사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경유차 등 다른 배출원의 영향까지 고려하면 사망자 수는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가습기 살균제는 피해가 확인된 이상 회피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미세먼지 공습은 피하려야 피할 곳이 없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더더욱 배출원에 대책을 집중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판매를 금지한 것처럼 ‘소리 없는 살인자’들의 손발을 묶어 가능한 한 빠르게 퇴출시켜야 한다. 최대 배출원인 석탄화력발전소와 경유차는 그대로 두고 고등어구이로 초점을 흐리는 얄팍한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와 미세먼지가 상징하는 복합위기는 이렇게 묻고 있다. 대한민국은 국민 생명과 기업 이윤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는 나라인가.


안병옥|기후변화행동연구소, 시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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