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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이라는 영화에는 동독의 국가안전부 요원이 취조 기술에 대해 강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서독으로 몰래 넘어간 공화국 배신자의 조력자를 붙잡아놓고 또 다른 공범을 대라고 다그친다. 조력자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때 아이들과 공원에 산책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를 만났다고 주장한다. 요원은 학생들에게 40시간 동안 계속 취조하면 진실이 밝혀진다고 말한다. 40시간의 끈기란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말하는데, 그동안 잠을 못 자서 정신이 혼미한 조력자는 부인을 체포하고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낸다는 말에 두 손을 들고 만다. 요원은 학생들 앞에서 죄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다. 죄가 없는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분노하게 되지만, 죄가 있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말이 없어지거나 운다고 말한다.

당시의 동독은 자살률이 매우 높았다. 회색의 도시에서 우울한 삶을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이 아마 절망 속에서 자살로 내몰렸던 탓일 것이다. 1980년 동독의 자살률은 10만명당 약 33명이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한국의 자살률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통계는 없지만 한국의 높은 자살률에는 검찰 조사 중 자살도 일조하는 것 같다. 그런데 영화 속의 죄 없는 사람에 대한 국가안전부 요원의 설명은 그럴듯하지만, 한국의 취조 중에 발생하는 자살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억울해하고 분노하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며 싸워야 할 터인데 종종 결백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걸 최후의 저항수단이라고 보면 영화 속 요원의 설명이 들어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신문 보도를 믿는다면 한국의 취조도 동독의 취조와 비슷하게 진행된다. 다른 탈출 조력자의 이름을 대지 않으니까 부인과 아이들을 벌주겠다며 압박하는 것이나 부인이 하는 사업까지 샅샅이 뒤지며 ‘딜’을 하자고 조여드는 게 다를 바 없잖은가? 민주화된 지 30년이 되어가는 한국의 취조 방식이 국가안전부가 침실까지 감시하던 동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 현실이 혼란스러워서 올해 스무 살이 된 대학생하고 이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좀 나누어보았다. 그는 한국이 원래 그런 것 아니냐, 요란 떨 것 뭐 있느냐는 식으로 반응한다. 냉소적이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다 선거 때마다 조금씩 주고받고 그러는 거잖아요”라는 당사자의 증언도 있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이게 정말 정치권의 일반적인 관행이고 가끔 폭로나 수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경우에만 처벌받는 게 현실일 것 같다.

이야기는 앞으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아마 수사는 꽤 크게 벌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러나 엉뚱한 걸 끼워넣어서 물타기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완전히 망할 것이기 때문에. 그 엉뚱한 건 아마 야당 쪽 사람들의 선거자금 수사일 것이다. 조금씩 주고받은 걸 캐려고 들기만 하면 뭐든지 캐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양쪽에서 몇 사람 잡혀들어가고, 요란하게 보도되고, 여당이나 야당 모두 마찬가지이고 정치는 그런 것이라는 식으로 결론이 맺어질 것이다. 이런 예측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벌써 야당까지 수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15일 서울 서초동 (주)모바일랩 사무실에서 디지털포렌식 전문가 김인성씨가 경향신문이 검찰에 제출하기로 한 성완종녹취록 파일에 대한 증거보전 작업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조금씩 ‘주고받는 것’, 이게 우리의 현실일 것이다. ‘김영란법’까지 나와야만 할 정도로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된 이 현실이 바로잡힐 수는 있을지,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또 착잡해진다. 엄격한 정치자금법이 있지만 여전히 선거 때마다 조금씩 주고받고 있는데, ‘김영란법’만 특별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지 회의적, 비관적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나도 냉소적인 대학생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이필렬 | 방송대 교수·문화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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