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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시인

 
큰소리를 쳤지만 내심 걱정이었다. 담당자는 강좌 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나를 위한 글쓰기’라니, 흡인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밀고 나가기로 했다. 시 창작이라면 몰라도, 나는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 전문가가 아니었다. 특별한 목표를 성취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다. 시민들을 대면해본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 10명 미만이면 강좌를 개설하지 않기로 했다.

23명이 모였다. 일단 안심이었다. 자기소개는 시키지 않았다. 서로 글을 접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글쓰기의 필요성, 목표, 방법 등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다음, 엄포를 놓았다. “8주 뒤, 여기 앉은 분들 중 절반이 남아 있으면 기적입니다.” 나는 태반이 중도에 탈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속내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자아존중감을 회복하고, 관계의 재발견을 통해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그리하여 지금보다 나은 삶과 사회 추구하기. 이것이 ‘나를 위한 글쓰기’의 전략이자 목표다. 3~4주가 지나면서 ‘저자’들의 성장 환경, 직업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의사, 은퇴한 교수, 교사, 출판편집자, 공무원, 정보기술(IT) 업계 직장인, 소설가 지망생, 대학생, 드라마작가. 생각보다 열의가 대단했다. 17명이 8주 수업을 마치고 수료증을 받았다. 나로서는 기적이었다.

초반부에는 자존감을 되찾기 위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주제로 글을 쓴다. 그런데 대부분이 생애 최고의 순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당혹스러워한다. 연령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털어놓는 말이 또 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글을 써 본 적이 없네요.” 누가 칭찬을 하면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다른 사람의 글은 정확하게 분석하면서도 자기 글은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것도 매번 확인하는 공통점이다.

심리학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책을 읽다 보면, 한국인은 자존감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을 자주 접한다. 낮은 자존감은 승자독식사회, 성과중심사회가 만들어낸 ‘한국병’이다. 자기계발(서) 붐도 자존감을 강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존감을 회복하지 않는 한 글쓰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삶쓰기다. 자신의 느낌과 생각, 경험과 꿈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글을 쓰기가 어렵고, 발표는 더더욱 어렵다.

경향신문DB

 

자존감을 되찾는 방법 중 하나가 ‘나’를 주어로 한 글쓰기다. 잊지 못할 장소, 잊을 수 없는 음식 등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수강생들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짧은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감을 키워나간다. 또 다른 수확이 있다. 서로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글쓰기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공동체만큼 아름다운 공동체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1년여 동안, 글쓰기 강의실에서 새삼 확인한 것이다(나는 이 강좌에서 얻은 경험의 일부를 대학 교양 글쓰기 교재에 접목시켰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끊이지 않는 근본 이유 중 하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의 때마다 늘 강조하는 경구가 있다. ‘생각하지 않고서도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가 없다.’ 말만 무성한 사회, 말로만 이루어지는 사회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선거철을 앞두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나의 희망사항은 하나다. 이 놀라운 뉴미디어가 ‘말하기’가 아니고 부디 ‘글쓰기’의 차원에서 변화를 일으키길 바란다. 감동적인 이야기, 멋진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집단지성의 힘을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 글쓰는 사회 만들기 시민행동을 출범시키면 어떨까요.” 강의가 후반부로 접어들 때면 내가 농반진반으로 던지는 제안이다. 그러면 ‘이것이 나를 분노하게 한다’를 글쓰기 과제로 받아든 수강생 중 몇몇이 눈을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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