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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자질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면서 ‘올해의 유행어’ 반열에 오른 용어들이 있다. ‘대안적 사실’ ‘정상화’ ‘가스라이팅’이 바로 그것이다. 셋 다 생경한 말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대통령 탄핵심판 결과가 10일 나오는 우리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대안적 사실’은 거짓을 덮기 위한 변명의 도구로 사용됐다. 발단은 지난 1월20일 열린 미국 대통령 취임식. 축하 인파가 과거 어느 때보다 적었다는 언론보도에 격분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대변인을 시켜 취임식 “역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이 명백한 거짓이라는 사실은 두 행사를 찍은 항공사진이 비교되면서 금세 드러났다. 이때 궁색해진 백악관 쪽이 들고나온 것이 “대변인은 거짓을 말한 게 아니라 대안적 사실을 제시한 것일 뿐”이라는 논리다. 박근혜 대통령의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는 발언도 이런 논리와 다를 것이 없다. ‘정상화’라는 용어 역시 들으면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쳤던 박 대통령을 떠올리게 된다. 대통령이 원하는 것이 정상이고 싫어하는 것은 비정상이었을 뿐이다. 가스라이팅의 원조는 1938년 개막된 <가스등>이라는 연극이다. 이 연극에서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미치게 하려고 일부러 가스등을 어둡게 조절한다. 아내가 등불이 어두워진 것 같다고 할 때마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잘못 본 거야”라고 부인한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아내는 자신의 현실 인지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게 된다. “검찰 공소장이 상상과 추측으로 지은 사상누각”이라는 청와대의 주장은 한국판 가스라이팅을 노린 것이다.

2011년 3월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전 인근 지역 마을 농토 등에 방사능 오염토가 담긴 포대가 가득 쌓여 있다. 윤희일 기자

거짓과 독단, 세뇌는 6년 전 원전 재앙을 경험했던 일본 후쿠시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고 발생 직후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데이터를 감춘 채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거짓말과 도쿄전력의 은폐 탓에 방사능 오염 피해의 규모와 범위는 사고 발생 후 한참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일본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아베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가 통제 아래에 있다고 공식 석상에서 말했다. 하지만 아베의 발언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도쿄전력이 실토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내부이주감시센터(IDMC)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동일본대지진과 방사능 오염을 피해 후쿠시마 주변 지역을 떠돌고 있는 주민은 13만4000명에 달한다. 이 중 8만4000명은 아직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베 정부는 이달 말 후쿠시마현에 내려진 대피령을 모두 해제할 계획이다. 하지만 귀향을 저울질하고 있는 주민들은 여전히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제염 작업은 주거지와 농지, 공공도로에서 이루어졌을 뿐, 산촌 주민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숲속 방사능 레벨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정상화’를 말하고 있지만 ‘정상으로의 복귀’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일본 정부는 1년 후에는 피해 보상도 끝낼 것이라고 한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보상을 중단한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지금 후쿠시마 주민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지원도 없이 다른 지역에서 정착을 시도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일본 정부와 원자력계가 벌이는 세뇌는 집요하다. “아직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들이 방사능 공포증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봄기운이 완연한 오후, 멀리 광화문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묻는다. 서울의 광화문,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그리고 후쿠시마의 작은 마을에도 봄은 올 것인가. 기다리면 언젠가는 올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직은 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시인 김수복의 권유처럼 봄나무 속으로 걸어들어가보는 것이 어떨까.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시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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