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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2016년 가을을 ‘사기꾼들의 전성시대’로 기록할 것이다. 미국에서 사기꾼들이 최고의 호경기를 누렸던 때는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의 재임 기간이었다. 금시장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던 ‘검은 금요일’과 대통령의 개인 비서 등이 정부 돈 수백만달러를 빼내 썼던 ‘위스키 링’ 추문은 모두 그랜트의 비호 또는 묵인 아래 발생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딴 ‘그랜트주의’는 무능, 부패, 담합, 족벌주의, 정실인사가 버무려진 ‘잡탕 스캔들’을 상징한다. ‘그랜트주의’는 내년부터는 ‘트럼프주의’에 자리를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 역사상 가장 자질이 떨어지는 대통령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막장 드라마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국과 달리 한국의 막장 드라마는 종영을 앞두고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대통령과 호위무사들은 지금 물러나는 건 무책임하다며 하야를 원한다면 탄핵하라고 뻔뻔하게 버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이 드라마가 그리 오래갈 것 같진 않다. 감춰진 진실이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지만, 이미 밝혀진 것만으로도 대통령 자격은 이미 박탈당한 것으로 봐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권력 핵심부의 추악한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국정개입은 루머라더니 ‘수사 대비 지침서’를 만들어 국민들의 눈과 귀를 속이려 했다는 물증까지 드러났다.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는 대통령과 그의 수하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민심은 철저하게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국민의 분노와 인내심도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그들은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벌려 하겠지만, 결국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국민들을 능멸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그들의 단죄만이 아니다. 해야 할 질문이 많다. ‘박근혜·최순실’이 다시는 출현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들의 전횡을 알면서도 눈을 감았던 세력의 책임 추궁은 어떻게 해야 하나. 대통령 퇴진 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 대한민국은 과연 달라질 것인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대통령 개인의 자질 부족이나 ‘비선 실세’들의 불장난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붕괴는 박정희 패러다임이 지배해왔던 구체제의 해체’라는 최장집 교수의 진단에 주목하게 된다. 미국에 ‘그랜트주의’가 있다면, 한국에서는 아직도 ‘박정희주의’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인데, 누구나 알고 있듯이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패러다임’을 관철시키는 가장 충실한 아바타였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구체제가 해체되는 자리에 나라다운 나라의 비전을 세우는 일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이 상징하는 구체제는 단순히 ‘견제받지 않는 권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패 스캔들로 점철된 ‘그랜트주의’와도 다르다. 최장집 교수는 국가와 재벌 대기업의 동맹, 노동 시민권의 부정, 자유로운 시민사회 억압, 지역 권력 분산 금지, 반공의식과 국가주의 이념 주입 등을 꼽았다. 어디 그뿐이랴. ‘경제발전이라면 공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던 경제 제국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비전은 소수의 정치인들과 엘리트만이 아니라 국민들이 함께 그려나가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나라의 비전이 ‘존중 사회’였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노동 존중, 생명 존중, 평화 존중, 인권 존중, 문화 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복지국가’를 우리가 가야 할 이정표로 삼는 것이다. ‘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복지국가의 틀 내에서라면 경제 양극화가 신분사회의 고착을 만들어내는 반헌법적인 질서도 금세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잃어버린 진실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세월호 진실규명과 국정교과서 철회 등 ‘비정상의 정상화’ 말이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시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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