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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농단’을 입증하는 태블릿 PC가 나왔다는 그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태리 식당에 있었다. 막 ‘먹물 파스타’를 주문하고 난 참이었다. 스마트폰에 와이파이를 접속해 익숙한 포털 사이트 로고를 터치하는 순간, 쾅 하고 머리를 북채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생업에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한 것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으나 밥맛은 천리만리 달아난 지 오래였다.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눈으로 먹는 것, 아니 흡입하듯 탐식하는 건 확실히 있었다. 뉴스였다. 스마트폰의 액정 위로 흘러넘칠 듯 폭발하는 뉴스.

태블릿 PC에 든 내용이 연설문을 비롯해 외교와 안보 관련 정책 등 권력 핵심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되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주변에 앉아 있는 외국인들이 한글로 된 뉴스를 알아볼 것도 아니고 “당신네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는 사람이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꼭두각시냐?”라고 물을 것도 아닌데 스마트폰을 감추고 싶어졌다. 이어 모욕감이 찾아왔다. 내가 가진 작은 권리, 시민으로서 위임한 주권이 사적인 물건이라도 되는 양 자기들 멋대로 주고받는 장난감이 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뉴스를 접한 뒤로는 계속해서 뉴스를 제공하는 포털 사이트, 언론사 홈페이지에 접속했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점점 중독자가 되어갔다. 단 5분이라도 뉴스를 확인하지 않으면 금단증상이 느껴졌다. ‘새로운 내용(News)’이 없으면 짜증이 났다. 사람들이 지금 겪고 있을 분노와 절망, 좌절감이며 박탈감과 근심이 뉴스를 타고 리얼타임으로 전해졌다.

뉴스와 문학은 모두 문장을 매체로 삼고 있다. 소설은 허구를, 뉴스는 사실을 다룬다. 소설은 창작이고 뉴스는 소스가 있는 이야기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뉴스는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인스턴트 식품과 같다. 다양한 사실을 담되 즉물적이고 자극적이며 전파력이 강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끌어모은다. 뉴스가 만발하면 문학은 위축된다. 문장과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지력과 주의력은 한계가 있으므로 뉴스가 주의력을 가져가면 문학에 배분될 게 줄어드는 것이다.

뉴스는 ‘현재,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박력이 넘치고 자극적이다. 문학은 느리고 점진적이다. 문장이 정련되고 산출되는 데 시간이 걸리며 감화와 설득의 과정이 길다. 뉴스가 직선주로라면 문학은 산책로처럼 에둘러가는 길이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지름길을 좋아하고 길 위에 오래 머물며 모든 것을 충분히 맛보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뉴스는 얼핏 보면 공짜처럼 보인다. 문학에는 많지는 않으나마 책값이나 저작권료 같은 비용이 따른다. 이런저런 걸 따져보면 뉴스와 문학은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다. 검투사와 농부가 전쟁터에서 만나는 격이랄까.

뉴스는 거죽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이다. 치명적인 독은 뉴스의 소스, 본질에 있다. 본질이 변했다. 제도의 근본은 썩고 법의 뿌리는 빠졌고 신뢰의 밑동이 잘렸다. 국민이, 신성한 주권이, 민주주의가 모욕당했다.

내게도 그 뉴스의 폐해는 너무도 명백하다. 이 ‘벙커버스터’ 폭탄은 단 한 방만으로도 문학 산업계를 초토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미 마감이 임박한 글 외에 생산성이 요구되는 ‘창조경제적’ 글쓰기는 거의 할 수가 없게 됐다. 그 뉴스 때문에 세상 전체의 담론이 획일화되고 상상력이 제한되며 생산성이 떨어졌다.

우리 각자의 생업과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피해는 그 뉴스에 담겨 있는 뇌물의 액수, 또는 편파적인 예산 배정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을 볼 때마다 밥맛이 떨어져서 음식을 적게 먹게 되는 까닭에 요식업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다이어트 관련 산업도 마찬가지다. 누가 이 계절에 고요히 책을 읽고 있는가.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미국 대선이 끝난 뒤 날아온 문자 메시지처럼 ‘세상이 망하기 직전인데 열심히 일(공부)하면 뭘 하나’ 같은 허탈감과 무기력증이 사람들을 공습하고 있다. 한 줌도 안 되는 ‘그들’의 악행이 우리의 평안과 안식과 즐거움, 활력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 뉴스 이후로 도대체 웃을 일이 없다. 사람들은 밤잠을 설치고 집단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감정의 소모와 분노, 의심과 불신이 일상화되었다. 이 나라가 국민이 주인인 민주국가인가? 권력자를 ‘하늘의 자식’이라고 불렀던 고대의 군주, 왕권신수설의 봉건제 국가의 왕에게나 가능한 권력의 사유화, 아무런 직위도 없는 그림자 권력의 발호가 21세기의 민주국가, 그것도 남의 나라가 아닌 내 나라에서 일어나다니? 최악의 문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권력 사유화의 선례를 만들었음에도 그것이 왜 큰 잘못인지조차 모르는 듯한 태도이다.

그 뉴스는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이 사회의 안전과 평등, 경제에 관한 문제를 지금 누가 돌아보고 있는가. 그들끼리 입만 열면 하는 말로, ‘국정’이니 ‘민생’이니 하는 것은? 지금도 어디선가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을 권력형 범죄, 부정부패에 대한 감시는? 기강은? 질서는? 법치주의는?

황태자? 비선? 실세? 문화융성? 창조경제? 융복합? 단어조차 역겹고 신물 난다. 온 나라가 악성 뉴스의 방사능에 뒤덮인 듯하고 사람들의 내면은 최면술에 걸린 듯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다.

몇몇 개인의 욕심과 권력의 오용, 그들이 챙긴 사적 이익은 산불의 불씨처럼 세상을 불태울 화근이다. 지금의 시작은 기실 심히 미약할 것이다. 미래에 두고두고 도래할 끝의 창대함에 비하면. 내 상상력은 그 끝이 어떨 것인지 그려내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유화된 밀실 권력의 행태는 언제나 문학적 상상력을 뛰어넘었다. 37년 전 그들이 국가정보기관의 안가에서 대연(大宴), 소연을 열며 서로를 죽이고 죽는 종말론적인 막장 공연을 연출하던 예가 그러했듯.

지옥 같은 뉴스의 진원지를 핵폐기물 처리장처럼 엄중하게 봉인하고 벙커버스터 폭탄으로도 결코 부서지지 않을 두꺼운 콘크리트로 덮어버릴 수는 없는가. 그 안에다 끼리끼리 해 먹기 좋아하는 그들을 몰아넣고 방사능의 반감기가 오기까지 다만 1000만년이라도.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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