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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동일한 물리적 공간에 모인 다수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사회학자들은 군중의 유형을 다양하게 구분한다. 쇼윈도 앞에 모여든 ‘우연적 군중’과 스포츠 경기관람을 위해 모인 ‘관습적 군중’으로 나누거나, 강렬한 일체감으로 군무에 빠져드는 ‘춤추는 군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군중행동 가운데 언제나 주목되는 것은 집단저항이나 시위에 참여하는 ‘능동적 군중’이다. 능동적 시위군중은 자칫 충동적으로 변해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서구의 대규모 시위는 약탈과 방화가 없는 경우가 드물다. 시위군중의 폭력성은 자극에 대한 순간적 반응의 효과이기 쉽다. 생각할 틈도 없이 나타나는 ‘순환적 반응’인 셈이다. 반면에 사람들의 일상적 상호작용은 순환적이 아니라 상대의 말과 몸짓을 알아듣고 이해한 후에 반응하는 ‘해석적 과정’이다.

지난 주말 광화문에 모인 100만명이 넘는 군중시위에는 폭력도 없고 순환반응도 없었다. 빼어난 시민의식이라고 했다. 21세기에 ‘무당국가’로 낙인 찍혀 해외에서 추락한 국격을 그나마 100만 촛불시민의 수준 높은 시위문화가 살렸다고도 했다. 그 날 구름처럼 모인 100만의 시위군중은 놀라우리만치 이성적이었다.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점령’했던 거리에 쓰레기 한 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무서운 시민들이었다. 그들이 거리로 나와 외친 것은 광폭한 불만이 아니라 아주 냉철하고 차가운 분노였다. 그들은 충동적 군중이 아니라 서로의 표정을 읽고 연사의 발언에 귀 기울이며 끊임없이 현실을 판단하는 ‘해석적 군중’이었다.

수학능력시험을 마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17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대통령 퇴진 촛불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 무서운 100만 군중의 차가운 분노는 모든 정세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오만과 시간 끌기, 변호사의 입을 통해 확인된 어떻게든 임기를 채우고자 하는 몸부림과 뻔뻔함, 그 모든 것을 냉철하게 포착했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 이익에 따라 분열하는 정치인의 타산적 행동 또한 분명히 가릴 것이다. 특히 대안이 되어야 할 야권에 대해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오직 하나의 대오를 만들기를 염원하고 있다. 야권 내의 서로에 대한 비방은 시민들에게는 이기적일뿐더러 때 이른 선거공학으로 비칠 뿐이다. ‘부패’로 망하는 박근혜 정권의 목전에서 ‘분열’로 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박근혜 퇴진의 절체절명한 국면에서 비난은 오로지 이 대오를 이탈하는 경우로만 한정되어야 한다.

이제 저 무서운 100만의 해석적 군중 앞에서, 나아가 그들이 내리는 ‘명령’ 앞에서 야 3당은 하나의 대오로 결집해야 한다. 마침 그 조건도 만들어졌다. 국민의당과 정의당이 이미 ‘질서 있는 퇴진’을 일관되게 주장했고,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도 대통령 퇴진을 당론으로 정했다. 대권주자들도 대통령 퇴진 대오에 모두 동참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광장의 100만 시민과 함께 퇴진운동에 벌써 뛰어들었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도 마침내 국민과 함께 전국적인 퇴진운동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이제 야 3당은 가슴 뚫린 시민들을 위무해야 한다. 촌철의 상황도 놓치지 않고 차가운 분노로 대응하는 위대한 시민을 이제는 야 3당이 앞서서 끌어줘야 한다. 야 3당이 당리당략을 넘어 박근혜 퇴진운동을 거국적으로 주도했으면 한다. 이번 주말 또 한 번의 100만 군중 앞에서 그 출발을 알렸으면 한다.

나는 이번 주말 다시 모이게 될 광화문의 100만 촛불 군중 앞에서 야 3당이 ‘박근혜 퇴진 2000만 서명운동’을 천명할 것을 제안한다. 이미 안철수 전 대표는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운동을 야 3당이 공조해서 2000만 서명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올 연말을 기한으로 적극 추진했으면 한다. 나아가 야 3당은 조기 대선을 포함한 정권이양 일정을 합의해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통해 박 대통령의 퇴진을 압박했으면 좋겠다.

1986년 2월 당시 신민당과 민추협은 ‘1000만 개헌서명운동’을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의 혹독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 연행과 투옥이 일상화된 가운데 서명운동이 진행되었다. 그 험한 시절 1000만 서명운동을 추진한 민주화의 역사를 되새긴다면 우리 시대에 어디로든 흐르는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2000만 서명은 빠르고도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야 3당 대표와 대권주자들이 손을 맞잡고 전국을 순회하며 서명운동본부를 발족시킨다면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가 트일 수 있지 않겠는가?

100만 군중을 2000만의 시민행동으로 잇고, 마침내 박근혜의 ‘사설국가’를 정상적 민주공화국으로 되살리는 역사의 과업을 이제 야 3당이 기꺼이 떠안아야 한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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