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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저 그렇고 그런 슈퍼맨 이야기이겠거니 했다.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극장을 찾는 게으름뱅이인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극장에 걸린 많은 영화들 가운데 <맨 오브 스틸>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할리우드 영화 중 가장 자기 성찰적인 장르는 영웅이야기’라는 세간의 평이 기억났을 뿐이다.

슈퍼맨의 고향인 크립톤은 과학기술 수준이 지구보다 몇 광년이나 앞섰지만 자원 고갈로 멸망 직전의 상태에 놓인 행성이다. 부패한 관료주의와 소멸되어 가는 행성의 문화는 크립톤의 옛 우주선인 블랙제로와 지구의 북극 빙하에 갇혀있는 스카우트 선의 모습에서 그 흔적을 드러낸다. 그때 한 아이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태어난다. 부모는 이 아이를 캡슐에 태워 머나먼 지구로 보낸다. 슈퍼맨의 운명을 지닌 이 아이의 지구 이름은 클락이다.

생판 모르는 행성에 떨어뜨려진 클락의 외로운 성장 과정은 ‘너무도 인간적인’ 슈퍼맨의 등장을 예고한다. 감각이 초인적으로 발달한 클락은 사람들의 피부 속까지 훤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근육과 뼈, 신경과 핏줄, 심장의 움직임, 그들의 작은 속삭임까지 다 보이고 들리는 과감각의 세계에 살게 된다. 그의 앞길에는 늘 위험과 외로움이 따라다닌다. 클락이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의 이유는, 그가 그 일들을 다 겪어낸 후에야 비로소 실체를 드러낸다.

클락은 지구를 정복하려는 조드 장군에 맞서 사투를 벌인다. 이때 도드라지게 대비되는 것은 죄의식과 종족주의이다. 조드 장군은 클락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는 죄의식이라는 게 있어서 나와의 싸움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당연히 이 싸움은 죄의식이 없는 내가 유리하다.” 종족 보존이라는 대의에 사로잡힌 조드 장군에게 죄의식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다. 행성의 환경과 기후를 종족의 생존에 적합하게 개조시키려는 테라포밍에서는 모든 것을 국가와 민족의 이해득실 관점에서 접근하는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검은 그림자가 발견된다.

영화 ‘맨 오브 스틸’ (출처: 경향DB)


흥미로운 것은 조드 장군이 의지하는 종족주의의 신념과 <위험사회>의 저자인 울리히 벡 교수가 경고하는 ‘민족주의에 대한 과도한 몰두’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방한한 벡 교수는 최근 열린 강연에서 “모든 문제를 국제사회 내에 구성되어 있는 국가의 맥락에서 규정하는 방법론적 민족주의는 기후변화의 관점에서 전혀 적합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기후변화의 위험은 대기 이산화탄소 농도나 지구의 기온을 나타내는 수치 이상의 문제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인식 위기에 대한 경고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벡 교수의 말을 빌리면 ‘조직화된 무책임’도 전적으로 국가주의의 산물이다. 조직화된 무책임은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위험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사람들은 위험의 가시권에 놓여있지만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기회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 국가의 의사결정은 그 나라 국민들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의 이웃들과 후세대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사실은 ‘코즈모폴리턴 관점’을 취하는 경우에만 관찰할 수 있다.

코즈모폴리턴 관점은 ‘지구주의자의 관점’을 뜻한다. 종족의 부활보다는 지구의 생존을 선택한 슈퍼맨 클락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구주의자이다. 그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는 지구인 부모들의 도움이 컸다. 감각의 선택적 인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안정감은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감정의 절제는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안정감과 절제, 그리고 공감은 벡 교수가 말하는 ‘근대화의 재탄생’의 필수 요건이다. “전기는 밀양의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성찰적인 문구에서 지구주의자 슈퍼맨들의 대거 등장을 예감한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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