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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점석 | 비교문학자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포퍼는 열린사회의 적들로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꼽는다. 포퍼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세 사상가는, 미래의 역사 전개과정을 예측하는 것을 사회과학의 과업으로 삼고, 역사 전개의 특징과 경향 그리고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사회과학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역사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다는 것이다. 이들의 사고에 족쇄를 채워 그들을 닫힌사회의 이념적 파수꾼에 머물게 했던 역사주의는, 전체론과 실재적 역사법칙 그리고 유토피아 사상을 근간으로 시공을 초월해 기세를 떨친다.
하지만 그들이 건설하려는 미래사회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종식된, 역사가 종료된 사회이기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또한 원시 공동체사회의 평등한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잔인한 경쟁사회를 거쳐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다는, 그들의 단선적 역사인식은 추상적 신화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포퍼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열린사회의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들의 전체론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며 독자적인 삶을 모색하고 실천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압살할 뿐만 아니라, 장밋빛 환상을 심으며 방종과 전횡을 일삼는 독재자의 논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국민의례하는 박근혜전위원장 (경향신문DB)
닫힌사회와 열린사회의 투쟁에 대한 기록인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열린사회를 지향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실상은 닫힌사회에 똬리를 틀고 자신을 부정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건설함으로써 열린사회로 진입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박근혜 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탯줄인 ‘5·16 쿠데타’에 휘감겨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애처롭다. 4년 전엔 아버지가 주도한 군사정변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자평했다가 이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바른 판단”이라 개칭하고 여론의 향방을 살피는 그녀의 곤경이 난감하다. 아버지를 두둔하자니 유권자들의 눈총이 두렵고, 아버지를 넘어서자니 자신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게 되고!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바른 판단”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며, 말장난에 불과하다.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은 자기희생을 수반하기 때문에 비장한 카타르시스를 유발할 수는 있지만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바른 판단력을 유지하며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권능 저 너머에 있다. 박정희의 쿠데타를 불가피한 상황에서 감행한 최선의 선택으로 규정하려는 사람들은, 박정희가 전체주의적 독재를 행사하며 인권을 유린했을지언정,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해 국민들이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를 진일보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눈엔, 1939년 3월31일 만주신문의 ‘혈서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라는 제하에 실린,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을 감격시켰다”(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내용)는 박정희의 선택도 훗날 ‘구국의 혁명’을 기약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일 것이다. 군관학교를 마치고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는 만주군에서 복무하다 해방정국을 거치며 5·16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박정희가 감행한 숱한 선택은 개인의 영달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동시대인들에게는 질곡의 역사였다.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경선에 출마한 박근혜의 역사 시각을 거론하는 까닭은, 닫힌사회의 규범에 묶어 그녀의 이력에 흠집을 내려는 것이 아니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천박한 역사인식은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국민들에겐 굴종을 강요하고, 민족의 앞날엔 먹구름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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