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후쿠시마대학 부근에서 살던 준코는 아이 둘과 함께 거처를 도쿄로 옮겼다. 집에는 후쿠시마대학 조교수인 남편 지로만 홀로 남아 자취생활을 하고 있다. 지로에겐 가족과 헤어져 살게 된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다. 하지만 훨씬 더 괴로운 일이 있다. 입시 홍보를 맡았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을 후쿠시마대학으로 유치해야 하는 현실이다. 아이들을 도쿄로 피난시킨 처지에서 비슷한 또래인 남의 아이들은 후쿠시마로 오도록 권유해야 하는 그는 매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 얘기는 얼마 전 일본 시민사회가 발간한 <후쿠시마의 10가지 교훈>이라는 소책자에 담긴 내용의 일부다. 책은 몇 가지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먼저 후쿠시마 사고의 실체를 철저하게 지역주민들의 관점에서 기록했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간 나오토 전 총리의 탈핵강연과도 울림이 다르다. 저자들은 일본 사회가 체르노빌의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후쿠시마 사고 발생 후 극심한 혼란과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음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정리한 것이 10가지 교훈이다. 자신들이 겪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세계 시민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교훈을 공유하려는 목적이다. ‘원전은 안전하다는 선전에 속아서는 안된다’는 것에서 ‘사고 피해보상 부담은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까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내용은 많다. 떠난 자와 남은 자들의 고통만이 아니라 ‘동원된 자들’, 다시 말해서 사고 수습에 투입된 하청노동자들의 삶을 인권 시각에서 조명한 것도 이 책의 특별한 점이다.

후쿠시마신문화창조위원회의 사토 겐타 이사장이 원전 주변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있는 ‘건강생활수첩’을 보여주면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10가지 교훈 중에서 허투루 볼 만한 내용은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빠짐없이 언급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두 가지만은 꼭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제기되고 있는 “국가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의 중요성 때문이다.

첫 번째는 ‘긴급 시에는 먼저 피난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교훈이다. 후쿠시마의 경험은 원전 중대사고가 발생하면 정부의 피난 권고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무조건 빨리 원전에서 멀리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일본 정부는 당초 사고지점에서 반경 30㎞ 이상 떨어진 지역에 대해서는 피난 권고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 비, 눈 등 기상 상황은 방사성물질이 동심원 형태로 확산될 것이라는 가정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30㎞ 바깥 지역 중 특히 풍향 때문에 큰 영향을 받은 곳은 후쿠시마 원전 북서쪽 지방들이었다. 비와 눈에 섞여 대량의 방사성물질이 녹아내린 것이다. 이들 지역은 나중에야 피난 지시 대상이 되었다.

두 번째는 주민들은 스스로 정보를 입수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정보를 통제하고 불리한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후쿠시마 주민들은 원전사고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피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텔레비전 방송은 ‘현시점에서 위험은 없지만, 피난 지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다’라는 정부당국자의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후안무치함은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하던 순간에도 “선내에서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던 세월호에서 그대로 재연되었다.

후쿠시마에서는 아직도 12만명 이상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사고가 발생하면 국민 대부분이 나라 밖으로 피난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정부는 월성 1호기 수명연장을 밀어붙이고 한수원도 곧 고리 1호기 수명재연장을 신청할 태세다. 후쿠시마와 세월호의 비극에서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증거다. 아직도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은 정부와 기술자들이 잘 알아서 지켜주겠지”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후쿠시마의 10가지 교훈’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