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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있다. 1954년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하여 TV로 옮겨 1982년까지 이어졌고, 2005년부터 다시 방송되고 있다.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관객들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어린이는 아무리 뽐내도 사랑스럽다.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잘하는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제목이 여전히 어색하지 않다.

정조가 어느 날 역정이 묻어나는 비답을 내렸다. 심낙수가 홍국영, 구윤옥, 송환억 등을 비난하면서 이들이 있어서 치세라고 할 수 없지만 정조가 있으므로 난세라고도 할 수 없다면서 결단을 요구한 상소문에 대해서였다. 정조는 심낙수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그렇게 숨겨진 흠집까지 들추어내어 어지럽게 다투는 행위 때문에 치세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온몸에 퍼진 열병을 잡으려면 정수리에 침을 놓듯이 송환억을 처벌해야 한다는 심낙수의 주장에 대해, 장년의 환자와 달리 노년의 환자의 경우 정수리에 침을 놓았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반박하면서 마지막에 일갈했다. “네 몸을 사랑하듯이 나라를 사랑하라.”

터럭을 불어서 숨겨진 흠집까지 들추어내는 것을 ‘취모멱자(吹毛覓疵)’라고 한다. 요사이 정치계, 언론계를 보면 경쟁적으로 취모멱자에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자유로운 비판은 민주사회의 근간이다. 그것이 차단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 과정에 이웃 중국에서 일어난 사례에서 우리는 목도했다. 그러나 위기와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취모멱자가 만연한 사회 역시 매우 위험하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며 최선의 길을 판단하기란 매우 어렵다. 말은 아끼고 배려와 협조, 그리고 희생을 나누어 감수할 때다.

세상은 동심처럼 아름답지 않다. “누가누가 잘하나” 박수만 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가 “누가누가 못하나”만 찾아내려 혈안이 된다면, 험악한 표정의 관객들 앞에서 그 누구라도 한없이 망가지고 말 것이다. 내 건강을 지키듯이 공동체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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