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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늙은 농민

opinionX 2015. 11. 16. 21:00

오래전 내 꿈은 농민이었다. 이십대 후반까지만 해도 누군가 내게 꿈이 뭐냐 물으면 농민이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농민의 삶이 얼마나 각다분한지 몰라서 그랬던 건 아니다. 농촌을 전원으로 착각했던 것도 아니다. 어느 모로 따져보아도 농민이 된다는 건 그럴듯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꿈이란 게 어디 논리적이기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내가 이렇게 대답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도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농촌에서 사는 건 희망이 없다는 단순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충고를 들은 건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소설가가 된 뒤로는 새로운 형태의 충고를 듣기도 했다. 농촌을 배경으로 삼은 단편소설을 몇 편 발표했더니 나를 잘 아는 어떤 분이 조심스럽게 진심을 담아 말하기를 농촌작가로 한 번 인식되면 앞으로 소설 못 쓴다, 농촌소설 쓰다가는 소설가 인생도 끝장이라고 했다. 다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더 말하자면 꿈이란 게 어디 논리적이기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랜 세월 농민이 되기를 열망해왔고 그 열망은 단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눈을 비비며 나서야 하는 길은 얼마나 고되었던가. 이슬이 맺힌 풀들을 헤치며 걷노라면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게 마련이었고 웃자란 풀들의 날선 이파리에 베이고 긁혀 팔뚝에는 자잘한 상처가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면 해 뜨기 직전에만 불어오던 바람이 구름을 몰아가고 어둠이 걷히며 하늘이 열리는 걸 볼 수 있었고 검푸른 허공을 가르며 나는 새들을 볼 수 있었다. 밤새 숨죽여 흐르던 시냇물이 수런대고 그 위로 물안개보다 짙은 밥 짓는 연기가 흘러갔다. 그 길에서 나와 처지가 비슷한 조무래기들을 만났고 벌써 바지게 가득 꼴을 쟁여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그 노인처럼 늙고 싶었다. 결정적으로 농민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더 이상 내비치지 않게 된 건 이십대 후반에 고향의 농민회 형님들과 술자리를 갖고 나서였다. 그이들은 내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고 깔깔대다가 진심임을 알게 되자 정색을 하며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거의 협박 수준이었다. 나는 나대로 내 의지를 떠보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뻗댔는데 결국 울상이 되어 두 손을 들어야 했다. 억울하기까지 했다. 농민이 되고 싶다는 꿈을 다른 누구도 아닌 농민에게 비난받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갑오농민전쟁 사료를 찾다가 농민군을 학살했던 일본군의 기록을 보게 되었다. 내가 해독할 수 있는 건 일본군이 체포하거나 살해한 농민군의 신상명세뿐이었는데 신문기사문처럼 이름 옆에 나이가 병기되어 있었다. 기이하게도 십대나 이십대는 거의 없었고 삼십대가 조금, 나머지는 사오십대였다. 지금보다 평균수명이 한참 낮았던 걸 고려해본다면 대체로 중장년을 넘어 노년이라 해도 좋을 법한 사람들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왜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죽창을 들고 나서고 싶지 않았으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삼촌의 뒤를 따르고 싶지 않았으랴. 그이들을 가로막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삼촌이었으리라. 너희들은 젊으니까. 너희들은 살아야 하니까. 더러는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주저앉혀 놓았으리라. 그리고 그이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제야 협박을 해서라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주먹다짐을 해서라도 농민 따위는 되지도 말고 생각도 말라고 윽박질렀던 형님들의 서글픈 진심이 손에 만져지는 듯했다. 당신들은 여전히 농민이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 한 농민이, 한 생을 바쳐 간신히 칠십에 이른 한 늙은 농민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고 피 흘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 그이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건 오직 저 하늘과 땅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 감히 그이를 넘어뜨리고 피 흘리게 했다. 부디 일어나시라. 바지게 가득 꼴을 쟁이고 아침이 내려앉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시라.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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