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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을 하지 않은 지가 몇 달 되었다. 생계의 수단으로서 그 일을 완전히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지만 노동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만큼 간헐적으로만 한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충청도까지 가는 20만원짜리 장거리 콜이라든가, 10분만 운전하고 기본료를 받을 수 있는 간편한 콜이라든가, 하는 것들만 주로 다녀온다. 이제는 ‘계속 대리운전 하나요’란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지 않는다.

<대리사회>의 저자로서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제일 힘들었던 손님이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술에 취한 이들을 밤새 상대하는 노동이다 보니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다. 어느 직업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폭언이나 욕설부터 시작해서 조롱, 냉소, 위계, 통제, 이러한 단어들과 늘 마주해야 한다.      

어느 대리운전기사는 손님이 라이터를 달라고 해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답하니 “대리기사가 라이터도 안 가지고 다녀? 서비스 정신이 없어”라는 면박을 받기도 했다는데, 여기에 준하는 일들을 늘 겪는다.

그런데 모두가 입을 모아 가장 ‘나쁜 손님’이라 하는 어느 표본이 있다. 그들은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지 못하게 만든다. 대리운전 콜을 보내고는 홀연히 사라져 전화도 받지 않는 이들이 있다. 평균 1㎞의 밤거리를 걷고 뛰면서, 생소한 골목을 누비며 출발지에 도착한 대리운전기사는 마냥 기다리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다. 그러는 동안 소중한 시간이 흐른다. 특정 피크타임을 제외하고는 콜을 잡는 일도 쉽지 않다. 새벽의 몇 시간은 이들에게 그대로 돈이다.

언젠가 요리 프로그램에 나온 요리사들이 한결같이 ‘노쇼 문화’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약을 한 손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을 위해 비워둔 자리도, 준비한 음식도 자영업자의 입장에서는 부담해야 할 비용이 된다. 식당뿐 아니라 미용실, 병원, 콜택시까지 예약이 가능한 모든 서비스업이 그럴 것이다. 타인의 노동을 사겠다고 약속하고는 쉽게 파기해 버리는 이들이 많다.

지난주에는 30대 남성의 대리운전 콜을 받았다. 그는 정중한 목소리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했고 나는 10분 정도 걸리겠다고 답하고는 그에게 갔다. 출발지에 도착해 전화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했지만 “운전 중이어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는 기계음이 나왔다. 나중에는 아예 전화를 받고는 그대로 끊었다. 나는 30분가량을 약속 장소에서 서성이다가, 콜을 취소했다. 그에게 걸어간 나의 수고로움, 나의 시간, 혹은 다른 콜을 받았다면 벌 수 있었을 기회비용, 많은 것을 잃었다.

그는 아마도 2개 이상의 대리운전업체에 전화를 하고는 먼저 온 대리운전기사와 함께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술을 마시고 직접 운전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손님이 사라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콜을 취소한 나는 손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대리기사입니다. 그냥 가신 걸로 알고 콜을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 때문에 출발지까지 갔고 그건 한 사람의 노동이 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알아주십시오.” 그에게서 아직까지 답장이 오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일어나 술이 깬 그가 문자를 보고 한번쯤 부끄러워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 평범한 우리들이다. 휴대폰 화면을 몇 번 터치해 누군가의 노동을 예약하는 동안, 우리는 한 사람의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O2O서비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이어주는 새로운 형태의 예약 플랫폼이 생겼다. 특히 카카오를 기반으로 한 택시, 대리운전, 미용실 서비스 같은 것들이 그렇다. 나는 여기에 예약을 할 때 등록된 카드에서 예약금을 미리 지불하는 하나의 단계가 추가되기를 바란다. 그 과정을 통해 조금 더 기계 너머의 노동과 노동자를 상상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정착과 인식의 변환은 제도와 시스템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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