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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저격의 윤리

opinionX 2017. 6. 1. 11:12

글은 힘이 세다. 그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동아대에 근무하던 한 조교수가 아파트 9층에서 투신해 숨진 사건도 이에 속한다. 야외 스케치 수업 뒤풀이에서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했다는 내용이 담긴 대자보가 학내에 붙었다. 그는 성추행 의혹에 시달렸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대학 당국의 조사로 밝혀진 내막은 그와 함께 야외 스케치 수업을 갔던 ㄱ교수가 여학생을 성추행한 뒤 지위를 이용해 입막음하고 숨기려고 거짓 소문을 퍼트린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과 ㄴ교수도 사건에 연루돼 있었다. ㄴ교수가 한 시간강사를 성추행했다는 투서가 총장 비서실에 접수되자 관심을 돌리려고 학생에게 대자보를 쓰도록 종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소수의 사례로 사실에 기반을 둔 정당한 문제제기마저 선입견의 필터를 투과시켜 읽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글을 쓰는 입장과 보는 입장 모두 ‘폭로’의 글을 대할 때 어느 정도 침착해질 필요는 있을 것 같다고 다시금 느끼게 된다.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낄 때는 어떤 ‘문제’를 강하게 인지했을 때다. 나에게 분노나 스트레스를 안기는 문제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도대체 왜 그러는지, 도대체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탐구한 뒤 나름의 주장을 도출한다. 글 쓰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감정적 안정을 취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어 ‘이득’이다. 공포스러운 것은 미지의 존재다. 보통은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게 되면, 일종의 전략과 전술을 도출해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고 두려움은 완화된다.

문제는,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 제기 글은 일종의 ‘고발’이나 폭로의 내용을 담을 때가 많다. 내 기준은, 고발의 대상이 힘 있는 단체이면 적시해도 무방하지만 개인의 경우에는(특히 공직자가 아닌 경우에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굉장히 허약하고 가변적인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잘못을 한 인간에게 그 전과 다르게 살 수 있는 기회가 한 번쯤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족한 학습의 기회, 신체의 호르몬, 그날의 날씨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얼마든지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글을 쓸 때 그것이 누군가에게 학습과 성찰의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욕망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구조적 변화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좋은 구조 속에 살 때 좋은 사람이 될 확률도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행배틀’을 하지 않고, 타인에게 좀 더 너그러우며, 좀 더 친절하고 섬세하게 서로를 돌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한국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고, 어떤 제도나 문화의 변화가 필요할지에 대해 자주 고민한다.

이런 생각으로 글을 쓸 때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와 대안에 대한 상상을 담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 시작점이 내 경험일 때가 많다는 점이 딜레마다. 따라서 개인의 얼굴과 이름 등 신상은 가급적 밝히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이전에 나의 부친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는데 그 글에서 부친의 얼굴과 이름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부친이 곤란해지는 일도 없었다. 내 글을 읽은 내 부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러나 내 기준을 다른 이에게도 마냥 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겪은 것보다 더 큰 아픔을 겪은 이는 그런 ‘침착함’을 가지기 어려울 것이고,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은 글은 정치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저격’ 글을 통하지 않고도 피해자가 적절한 보상으로 심신의 상처를 회복할 수 있고, 구조가 개선되며 가해자에게 변화의 계기가 제공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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